은행원이자 고문헌 전문가 박철상 씨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찾아가는 일, 모두의 몫입니다

박철상(44) 씨는 은행원이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광주은행에 입사해 지금까지 외환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추사 김정희 스페셜리스트’로도 불린다. 추적하다시피 추사(秋史)를 연구해온 그는 은행 입사 후 본격적으로 추사와 조선 후기 문화에 대한 논문 30여 편, 《세한도(歲寒圖)》 등을 썼다. 또 <추사 김정희-학예일치의 경지>와 <추사를 보는 열 개의 눈> 등 추사를 주제로 한 전시 자문과 기획도 맡고, 옛 문서가 발견될 때마다 학계의 요청으로 번역과 자문 역할도 한다. “추사가 나에게 보내준 선물”이라고 한 《해동비고(海東碑攷)》 필사본 발굴은 그가 수집한 1만여 권의 고서 중에서도 놀라운 성과다. 그를 두고 열정적인 아마추어라 부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우리나라 고문헌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역사는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고,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박철상 씨가 고문헌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문헌과 토론’ 이라는 모임에 나가면서였다. 그는 이 모임에서 한 대학교수가 쓴 추사 논문에서 200곳이 넘는 오류를 지적·비평한 논문 <완당평전(阮堂評傳), 무엇이 문제인가?>(2002)를 발표해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는 이곳에서 지금까지 30여 편이 넘는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추사(완당) 선생께서 관 뚜껑을 박차고 나올 만한 일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논문에 200곳이 넘는 오류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요. 이것은 처음부터 추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거든요.”

일요일 아침, 인사동의 화봉갤러리에서 만난 그는 10여 년 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자신이 가장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추사 김정희인 만큼 애정도 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완당평전…>을 발표한 다음날로 돌아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평소 자주 가는 인사동의 고서점으로 찾았습니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노인 한 분이 보자기에 고서들을 싸서 황급히 자리를 떠났어요. 주인에게 물어보니 굉장히 귀한 추사의 책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그 노인의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추사에 대한 자료는 한 번이라도 직접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서점에서 만난 노인에게 자신이 모르는 추사의 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로 다음날 노인의 집으로 찾아갔다. 당시 노인의 거실에는 80권이 넘는 고서(古書)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는 그 책을 모두 샀다. 그 책더미 속에 추사가 지은 《해동비고》 필사본이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완당평전…>을 통해 추사 선생을 변호한 대가로 상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살아생전 자신이 쓴 글과 저서를 모두 불태운 그였기에, 이 책으로나마 후세에게 무언가를 더 알려주고자 한 것은 아닌가 싶었어요. 추사 선생이 저에게 보내준 선물이라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해동비고》는 쇠붙이나 돌에 새겨진 비문을 연구하는 학문인 금석학을 발전시킨 추사가 전국을 누비며 평백제비, 당유인원비, 경주 문무왕비 등 총 7점 비문의 내용을 적고 해석한 책이다. 박철상 씨가 발굴한 책은 후대가 필사한 종합본으로, 추사 연구와 역사 고증에 큰 가치가 있다.

“그동안 문무왕비가 만들어진 연대를 682년 7월 25일로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필사본은 문무왕비 건립 시기를 687년 8, 9월쯤으로 나타냅니다. 역사 고증도 틀릴 수 있지요. 그렇기에 고문헌 연구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한학자인 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한학 공부

그의 아버지는 한학자였다. 전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두 형과 함께 생활에서 한학을 익혔다. 특히 한 문장씩 배우는 한시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는 갓을 쓰고 다니셨고, 어른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거나 집안에 손님이 오셨을 때 예의를 갖추는 법 등 우리의 옛 교육을 보면서 자랐다”며 웃는다. 또 한학을 아버지로부터 직접 배웠기 때문에 대학원에서나 배울 수 있는 수준의 공부를 어린 시절부터 익히는 특권을 얻었다고도 한다.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형들이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좋다고 충고했어요(웃음). 대학에 들어와서 틈틈이 고서점을 다니며 옛날 문헌들도 살펴보고, 도서관에 있는 자료도 보고 그랬죠. 아버지가 한학자여서 좋았던 점은 언제든지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선생이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었어요. 모르는 것을 묻고 논의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배움에 큰 도움이 되거든요.”

그는 1만여 권이 넘는 고서를 소장하고 있다. 서울 자택과 전주 본가에 나눠 보관 중인데, 은행원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대학교수가 되었다면, 오히려 고서 수집은 꿈도 못꾸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고서 구입에 쓰는 정확한 액수를 밝힌 적은 없다며 피식 웃는다.

“수집도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훗날 값이 오를 책만 사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담은 책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 중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상당히 많거든요.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담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찾아내 세상에 발표하고 싶은 마음에서죠.”

그는 ‘포럼 그림과 책’의 공동 대표로도 활동하고, 지난해에는 <추사를 보는 열 개의 눈> 전시 기획과 2006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특별전인 <추사 김정희-학예일치의 경지>에서 번역과 자문을 담당했다. 또 조선시대 문신인 정약전이 천주교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에게 보낸 편지 번역작업 등 꾸준히 발견되는 고문서 번역 작업에도 참여한다. 그중에서도 추사가 남긴 작품 <세한도>를 연구한 책인 《세한도》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 종이에 수묵, 23.3×108.3cm, 손창근 소장
“추사 선생 서거 15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자문을 담당했습니다. 전시품을 선별하는 작업부터 도록에 실릴 자료의 탈초와 번역과 감수까지…. 그중에서도 지하 수장고에서 직접 <세한도>를 배관하는 영광은 평생 잊기 힘들 겁니다. <세한도>는 추사 선생이 제주도로 유배를 갔을 때 그린 그림입니다. 하지만 그림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어요.”

송영방 作 <추사선생영주적거도> 2008년 수경실 소장
<세한도>의 구조는 간단하다. 창문 하나 있는 허름한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 <세한도>라는 제목과 인장 몇 군데와 이상적에게 준다는 내용의 글씨가 전부다. 높이는 23.3.cm, 폭이 108.3cm에 달하는 긴 그림이다. 오른쪽에는 그림이, 왼쪽에는 추사가 쓴 글이 있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말을 되새기며 추사는 유배된 자신을 찾아온 이상적에게 이 그림을 건넸다. 박철상 씨는 “<세한도>가 탄생하고 유전된 과정은 그 자체가 19세기 조선 학예의 총화다”라고 설명한다. 이 밖에도 그는 연구를 바탕으로 한 책 작업을 진행 중인데, 올해 안으로는 중국 번역서인 《서림청화(書林淸話)》 작업도 마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도 우리 시대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자료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하고요. 추사 선생이 비문을 찾기 위해 전국을 누빈 것처럼 우리도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문화는 계속 흐르니까요.”

화봉갤러리에서 나와 박철상 씨와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그는 “요즘 서울에는 고서점이 거의 없어졌지만, 대전 이남 지역에는 숨겨진 보물이 많은 것 같다”고 한다. 단돈 10만원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자료를 알아보고 구입할 때 가장 기분이 좋다는 그는 소장한 책으로 박물관을 내고 싶은 계획도 가지고 있다.

“추사 선생이 무학대사비로 알려졌던 진흥왕순수비를 밝혀낸 것처럼 저도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매진하고 싶습니다. 물론 회사는 계속 다녀야죠. 딸들과 놀아줄 시간도 없고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하는 단점도 있지만….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사진 : 김선아
  • 201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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