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동안 2000여 명의 미혼모 출산 도운 산부인과 의사 민병열 씨

미혼모에게 따뜻한 시선 보내주세요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미혼모들은 마음 편히 산부인과 진료를 받을 수 없었다. 미혼모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았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어 경제적 부담도 컸기 때문이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민병열(64) 씨는 산부인과 의사로 미혼모의 대변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덕분에 2000여 명의 미혼모가 엄마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산전 검사에서 출산, 산후관리까지 무료로 미혼모의 출산을 돕는 민병열 씨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한다.

충북 청주시에 위치한 민병열산부인과의원의 로비는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임산부들로 북적였다. 병원 곳곳에는 자궁경부암 예방접종 권고나 무료 태교 일정 등의 내용이 담긴 포스터가 붙어 있다. 민병열 원장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자 간호사는 취재진을 진료실로 안내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민 원장의 뒤편으로 액자 하나가 눈에 띈다. 지난해 10월 10일 ‘임산부의 날’에 수상한 대통령상이다.

“병원 개원 후 한창 바쁠 때 김동일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제 딸과 아들이 김 신부님께 유아세례를 받은 후 식사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미혼모를 도울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민 원장은 1990년부터 김동일 신부가 운영하던 ‘자모원’의 미혼모들을 돕기 시작했다. 자모원의 미혼모들이 자신의 병원에서 산전 검사와 분만, 산후관리까지 모두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올해까지 민 원장이 출산을 도운 미혼모의 아이는 2000여 명에 이른다. 민 원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혼모의 분만을 체계적으로 도운 곳이 자모원”이라고 말한다. 미혼모들이 많이 찾아와 공간이 부족하자 민 원장은 간호사들이 머물 기숙사용으로 사두었던 양옥을 3년간 내주기도 했다. 그 후 자모원은 규모를 확장해 옮기고, 인천·대전·안산 등지에도 둥지를 틀었다. “5년 전부터 미혼모도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도 30~40곳으로 늘었다”며 미소를 짓는 민 원장. 그는 “청주에서 의사로 활동하는 지인들을 모아 ‘다락방 모임’을 열고, 소아과·치과·가정의학과 등 다양한 전공의 선생님들과 함께 자모원을 도왔다”고 말한다.

민병열산부인과는 지난해부터 저소득층 난임 부부를 대상으로 시험관 아기 시술 봉사도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미혼 여성들의 공통점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민 원장이 미혼모를 위해 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낙태를 원하는 이들에게 엄마가 되는 기쁨을 안겨주는 일이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저를 만나러 오는 미혼모들의 표정은 잔뜩 겁에 질려 있습니다. 고등학생의 경우 임신하면 퇴학 처리되고,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은 끝도 없으니까요. 낙태밖에 길이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고요. 아이를 낳아 키울 형편이 되지 않아 낙태를 선택하겠다는 이들에게 입양을 권하며 ‘어차피 자식 다 키워놓으면 결혼시키지 않느냐. 일찍이 좋은 환경으로 보낸다고 여기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또 새 생명과 함께할 기쁨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고요.”

낙태 얘기를 하던 중 갑자기 민 원장은 충주의 한 산부인과 이야기를 꺼냈다. 산부인과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인데, 처음부터 ‘낙태 수술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다. 개인 산부인과 병원에서 낙태는 주 수입원이라 병원 운영에 직결된 문제인데, 충주의 그 병원은 신념을 지키면서도 운영이 잘되고 있다고 한다.

“저도 산부인과 의사로서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있어요. 그러나 미혼모의 출산을 도우면서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고 갚은 게 아닌가 위안을 얻지요. 낙태를 결심했다 마음을 바꾼 미혼모들은 출산 후 더 책임감 있고 열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정말 보람을 느끼죠.”


미혼모들이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그날 위해 대변인 될 것

민 원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미혼모를 물었다.

“고등학생 임신부였는데,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했어요. 아이 아빠인 남자친구는 아르바이트해서 한 달에 100만원을 버는데, 자신도 아이가 태어나면 미용 기술을 배워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모성애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민 원장은 미혼모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또 “아이를 낳고도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한다.

“칠레는 출산한 학생들을 위해 중고등학교에 보육시설을 마련할 정도입니다. 미혼이라도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실제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당장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임신한 학생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혼모를 위한 대안학교를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처음에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무덤덤했어요. 몇 달 전 보건소에서 전화가 왔는데 ‘좋은 일한 것이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장애인 후원 몇 계좌를 개설했고, 그동안 미혼모 출산을 많이 도왔다고 답했더니 양식을 제출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한 보름 후에 보건소에서 ‘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고 하더니 정말 대통령상을 받았어요.”

민 원장이 상을 받은 후 그를 가장 칭찬한 사람은 바로 연세대 의대 동기들이다. 의사의 입장에서 미혼모와 함께한 그간의 세월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수상 이전까지 의대 동기들은 그가 미혼모를 돕는다는 사실을 대부분 몰랐다. 그는 일부러 말할 필요는 없었다고 한다.

“봉사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고, 시작도 그랬으니까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의사가 되면 봉사해야겠다고 사명감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요. 말 그대로 해야 할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할 일인 거죠.”

지난해부터 민 원장은 시민단체 ‘아가야’에서 저소득층 난임 부부를 위한 시험관 시술 봉사도 한다. 분기별로 정해진 난임 부부를 맡아 시험관 아기시술을 해준다. 그는 세계적으로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매스컴을 꼽는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주인공들이 결혼해서 3남매를 기르는 장면이 아주 행복하게 그려졌어요. 바로 이런 겁니다. 매스컴을 통해 출산의 즐거움을 널리 홍보해야 해요. 공익광고를 통해 ‘3명은 낳아야 잘산다’고 계몽한다면 저출산 문제는 점차 나아질거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민 원장은 김동일 신부와 미혼모를 위해 또 한 번 발 벗고 나설 예정이다. 김 신부는 동북아 지역의 미혼모를 돕는 사업을 계획하며, 민 원장에게 SOS를 요청했다. 이번에도 민 원장은 “해야 할 일이려니!” 하며 낯선 땅의 미혼모들을 만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진 : 신생화
  • 2011년 05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