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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당 ‘루이’ 연 여경래ㆍ여경옥 씨

최고의 중국 요리사 형제가 뭉쳤다!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먹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요.
내가 만든 이 요리를 먹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까, 늘 염두에 두죠.
후배들한테 요리를 가르칠 때도 ‘그 돈을 내고 먹을 가치가 있는 음식인지를 생각하면서 만들어라’라고 말해요.”
특급호텔 중식당을 주름잡던 요리사 형제가 의기투합했다. 타워호텔 중식당 ‘만복림’의 셰프이자 사장이었던 여경래 씨(48세)와 신라호텔 중식당 ‘팔선’의 조리 차장이었던 여경옥 씨(45세) 형제가 서울 태평로에 중식당 ‘루이(Luii)’를 열었다. 타워호텔에 있던 직원들이 대거 옮겨와 음식과 서비스 모두 호텔급이다. 이에 비해 가격은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일까. 지난해 12월 7일 문을 열자마자 입소문 듣고 찾아온 손님들로 연일 빈 좌석이 없다.

형제는 반반씩 투자해 이익도 반반으로 나누기로 했는데, 대외적으로 사장은 동생 여경옥 씨가 맡았다. 형 여경래 씨는 “사장이 둘이면 이상하잖아요? 가위바위보로 사장을 정할까 하다가 동생한테 떠넘겼어요” 하며 사람 좋게 웃는다. 그래서 형의 공식 직함은 ‘부장’, 동생은 ‘사장’이 됐다. 형은 타워호텔 중식당 경영 경험을 살려 경영과 마케팅에 주력하고, 동방미식대회 금상 수상으로 명실 공히 최고의 중국요리사가 된 동생은 요리에 주력한다. 1월 말, 형제는 소피텔앰배서더 중식당도 ‘접수’했다. 이곳 역시 형제가 공동 운영하는데 사장은 형이 맡았다.

여경옥 씨는 1984년부터 24년 동안 신라호텔 중식당에 몸담았다. 업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으며 안정된 삶을 꾸려 가던 그가 나가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텔의 만류가 심해 퇴사하는 데 두 달이 걸렸다고 한다.

“마흔 중반에 접어드니까 다르게 살고 싶었어요. 회사의 틀 안에서는 못 해본 것들을 맘껏 하고 싶었습니다. 형이 적극적으로 이끌어 줬죠.”

살아온 생의 절반 이상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시작하는 건 그에게 거대한 모험이었다. “이걸 오픈하느라 갑자기 늙어 흰머리가 늘었다”며 머리카락을 헤집어 보인다.

식당 명 ‘루이’는 형제의 성(姓) ‘여’의 중국식 표기. 형제는 화교다. 아버지가 중국인이고,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 연희동에 있는 한성화교학교를 다녔다. 둘이 있을 땐 한국어와 중국어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대화를 한다. 인터뷰 도중에도 기억이 서로 어긋나면 중국어로 이야기하면서 맞춘다. 형제는 참 많이 닮았다. 두 사람 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열일곱 살에 중국집 배달부로 시작했고, 두 사람 다 연년생 아들을 둘 두고 있다. 또 두 사람 다 한국 화교조리사협회 회장을 지냈고, 중국요리 국제대회 심사위원으로 있다.


중국동방미식대회에서 나란히 금상, 은상

동생 여경옥
형제가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대만국제요리대회에 국가대표팀으로 함께 출전해 동메달을 수상하면서부터다. 재료와 요리 방법이 다채로워 요리 수만 6만 가지가 넘는 중국요리, 그래서 미식가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중국. 이 상은 중국요리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 국제규모의 중국요리대회에 출전해 따낸 최초의 상이었다. 같은 해 중국에서 열린 중국동방미식대회에는 형제가 개인전에 나란히 출전, 라이벌로 맞붙었다. 이 대회에서 동생이 금상, 형이 은상을 수상했다. 형한테 “동생한테 밀리셨네요” 하자 동생이 가로채 “제가 좀 더 잘 생겼잖아요” 하며 농을 한다.

“동생이 호텔 일로 바빠서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했어요. 제가 대신 수상을 했죠. 양사언의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에 나오는 태산 있죠? 그 태산이 보이는 곳에서 시상식을 했는데, 전 세계에서 모인 수백 명 중국요리 명인들 앞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다 걸고 태산을 우러러보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어요. 주변에서 ‘형제가 다 해먹었다’며 시샘했죠.”

듣고 있던 여경옥 씨가 “국내에서는 제가 매체에 자주 나와서 유명하지만 중국 본토에서는 형이 더 유명해요”라며 형을 치켜세운다. 여경래 씨는 굴소스로 유명한 중국의 소스회사 ‘이금기’에서 한국인 최초로 훈장을 받으면서 이 회사의 요리 고문으로 위촉됐다. 그는 아직은 대만 국적이지만 수 년 안에 귀화할 예정. 여경옥 씨는 2007년 귀화했다.

형 여경래
형제는 업계에서 우애가 돈독하기로 유명하다. 어려서부터 우애가 남달라 한 명이 회초리를 맞으면 나머지 한 명이 덩달아 바지를 걷어붙였다 한다. 형이 끌면, 동생은 뒤에서 밀며 여기까지 왔다. 여경옥 씨는 “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사업을 시작하지 못했고, 형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형제에게 중국요리는 생존을 위한 절박함에서 택한 길이었다.

“제가 여섯 살 때, 동생이 세 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저희 집이 농사를 지었거든요. 채소를 판 돈으로 극장에 가려고 가족이 다 함께 집을 나선 날이었죠. 가족들이 먼저 버스에 타고 아버지는 길 건너에 있는 채소를 가져오느라 뒤늦게 길을 건너시는 중이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여경래 씨는 “부지런함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별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중국집 배달부로 취직한 그는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면서 한 달 내내 하루도 못 쉬는 때가 많았지만 군소리 없이 일했다. 이를 기특하게 본 선배들이 요리 기술을 하나하나 전수해주었고, 손재주와 미각이 탁월했던 그는 이를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중국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돈이 모일 때마다 책을 사보며 이론을 겸비해 나갔다. 그로부터 3년 후 여경옥 씨는 형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형제는 스타일이 다르다. 형은 스케일이 크고, 동생은 디테일에 강하다. 형이 요리 콘셉트를 정하면 동생은 재료와 요리방법을 연구한다. 화법도 그랬다. 형은 추상적으로, 동생은 구체적으로 말한다. 형제의 강점을 묻는 질문에 형은 “우리는 역지사지에 강해요”라고 말하면 동생은 이렇게 덧붙이는 식이다.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먹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요. 내가 만든 이 요리를 먹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까, 늘 염두에 두죠. 후배들한테 요리를 가르칠 때도 ‘그 돈을 내고 먹을 가치가 있는 음식인지를 생각하면서 만들어라’라고 말해요.”

똑같은 소스를 가지고, 똑같은 레서피로 요리를 해도 맛이 다른 건 결국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게 형제의 생각이다. 형제는 중국요리의 트렌드를 이끌어 간다는 선구자적인 마인드가 강하다. 웰빙 시대에 맞춰 저염식으로,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고 요리한다고 한다. 앞으로는 ‘여경래 요리’, ‘여경옥 요리’ 식으로 특화된 요리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형 여경래 씨는 “저희 형제는 계속 발전 중이에요. 어디까지 발전할지 저희들 스스로도 궁금해요”라고 말했다. 형제는 강했다. 하나로 뭉친 루이 형제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사진 : 이창주
  • 200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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