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식객>의 음식 만든 김수진 푸드앤컬쳐아카데미 원장

한국 최초의 음식감독

“제가 워낙 허영만 선생님 만화 <식객> 마니아예요. 신문 연재도 꼬박꼬박 보고, 책이 나오면 서점에 한달음에 달려가 사서 읽었죠. 보면서 생각했어요. ‘이게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음식은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 꼭.’ 하고요.”
싱싱한 도미를 포 떠 전을 부친 뒤 갖가지 채소, 버섯, 황백 지단과 함께 돌려 담아 끓인 도미면, 팔딱거리는 황복을 잡아 창호지처럼 떠서 학 모양으로 펼쳐 놓은 황복회, 장독에서 막 꺼낸 노란 된장을 풀고 달래, 파를 넣어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

맛있는 영화 <식객>은 말한다. ‘맛을 느끼는 건 혀끝이 아니라 가슴이다.’ 모든 욕망을 떨쳐 버리려는 엄숙주의자들의 마음을 정성어린 만찬으로 녹여 버리는 영화 <바베트의 만찬>, 달콤한 초콜릿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영화 <초콜릿>. <식객> 역시 어머니의 사랑을 상기하는 반드르르한 고구마가 사형수의 마음을 치유한다. 눈이 즐거운 영화 <식객>이 관객의 마음도 연 것일까. 톱스타 한 명 없는 저예산 영화임에도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 개봉 3주 만에 관객 200만 명을 동원했다.

도미면
이 영화는 ‘최초의 본격 음식 영화’ 외에 ‘최초’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만들어 냈다. 이 영화를 통해 최초의 ‘음식감독’이 탄생한 것이다. 그 주인공인 김수진 푸드앤컬쳐아카데미 원장을 만났다. 효자동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만난 그는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영화에 이어 드라마 <식객>의 음식감독도 맡아 잠을 제대로 못 자다 보니 망막의 혈관이 터져 수술을 받았단다. 영화 <왕의 남자>와 <음란서생>에서 음식을 담당하면서 내공을 다진 그는 일찌감치 <식객>에 눈독을 들였다.

“제가 워낙 허영만 선생님 만화 <식객> 마니아예요. 신문 연재도 꼬박꼬박 보고, 책이 나오면 서점에 한달음에 달려가 사서 읽었죠. 보면서 생각했어요. ‘이게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음식은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 꼭.’하고요.”

지인을 통해 <식객> 음식감독 의뢰를 받은 그는 무조건 수락했다. <식객>의 감독은 “제작비가 얼마 안 돼서 돈은 많이 못 드려요” 했지만 그는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 수 있게만 해달라”고 했다.

김 원장은 총 촬영기간 6개월 중 3개월 동안 제작진과 동고동락하며 <식객>에 등장하는 음식의 요리는 물론, 배우들의 칼 잡는 법, 썰 때의 간격 등을 하나하나 코치했다. 배우 김강우와 임원희는 푸드앤컬쳐아카데미에서 6주간 하루 5시간씩 김 원장에게 요리 지도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배우들은 화양적 꽂이, 고기 치대기, 황복 놓기, 무 썰기 등을 대역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김 원장은 “이젠 배우들이 날아갈 듯 무를 썰죠” 한다.


배우들이 “밥 주세요” 조르는 촬영장의 ‘엄마’

황복회
그는 ‘촬영장의 엄마’로 통한다. 배우들은 스스럼없이 와서 수시로 “원장님, 배고파요. 밥 주세요” 한다. 드라마 <식객>의 주인공을 맡은 김래원은 그의 팔짱을 끼면서 “원장님, 저 영세 받았어요. 원장님 눈 빨리 낫게 기도해 드릴게요”라며 애교를 부린다. 영화 <식객>에 쓰인 요리 재료는 소 3마리, 닭 300마리, 황복과 도미 등 생선 100마리, 쌀 3가마, 달걀 300판, 배추 20박스, 무 1000개 등으로 재료비만 1억 원 정도 들었다. 죽음과도 맞바꿀 만한 맛이라는 최상급 황복은 한 마리가 100만 원이 넘고, 최상급 한우는 600만원이 넘는다.

김수진 원장은 “제대로 된 표정 연기가 나오려면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했다며 <왕의 남자> 촬영 당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감우성 씨가 닭을 찢으며 먹는 장면이 있었어요. 휴대용 가스레인지 10개를 가져다 놓고 온도를 재가며 끓였어요, 10~15℃일 때 가장 맛있거든요. 이준기 씨랑 감우성 씨가 음식 신을 찍고는 ‘원장님, 이거 먹어도 돼요? 너무 맛있어요’ 했어요. 촬영장에서는 ‘소품을 먹으면 3년 재수 없다’는 속설이 있어 먹은 음식은 원래 뱉어 내거든요. 그런데 제가 만든 음식은 촬영 끝내고 모두들 모여 파티를 하며 남김없이 먹었지요.”

<식객> 촬영장은 파티의 연속이었다. 눈도 즐겁고 맛도 있는 음식을 만들다 보니 촬영이 끝나면 잔치가 이어졌다. 소를 잡은 날엔 바비큐 파티도 했다.

꿩만두전골
김수진 원장의 손맛은 엄한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가풍 엄격한 집안의 맏며느리인 그는 삼월 삼짓날,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등 명절을 세세히 챙기는 시어머니 밑에서 된장, 고추장, 간장 담그는 법부터 배웠다. 결혼 첫해 간장 맛이 변하는 바람에 시어머니를 따라 삼각산에 올라가 굿도 했단다. ‘며느리가 잘못 들어오면 간장 맛이 변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던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건 생계를 위해서였다. 사업하는 시동생에게 돈을 빌려 주느라 집을 저당 잡혔는데, 사업이 잘못돼 집을 팔아야 했던 것. 알뜰살뜰 모아 마련한 2층짜리 저택을 팔고 17평짜리 아파트로 옮겼다.

“옷은 남대문에서 사입고, 양말을 빨 때에도 비누칠을 세 번 이상 하지 않으면서 절약해 모은 돈으로 마련한 집이 없어지고 나니 막막했어요. 두 아이들 교육비를 생각하니 더 캄캄했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규모여성창업자과정에 입학해 결석 한 번 지각 한 번 안 하고 과정을 이수한 그는 서울 대치동에 ‘부부보쌈’을 차렸다. 하지만 얼마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반지하라는 입지 조건 때문에 손님을 끌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가 그에게는 현장학습의 귀중한 나날이었다.

“서울의 유명한 보쌈집을 다 누비면서 고기 맛과 김치 맛을 밤새 연구했어요. 수없이 ‘왜?’라는 의문을 품었죠. 왜 이 집 김치는 맛있는데 내건 맛없지? 왜 이 집 고기는 부드러운데 내 건 이렇지? 계절별로 배추의 수분을 분석하고, 고객의 취향을 분석해 매일매일 일지를 작성했어요.”

영화 <식객>의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김 원장의 과학적 분석 연구 결과가 반영된 식당은 나날이 맛이 좋아졌고,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식당 오픈 18개월째, 한 일간지에 ‘숨겨진 맛집’으로 소개되면서 소위 대박이 났다. 오전 11시부터 고객이 몰려들기 시작해 식사 시간엔 대기자들의 줄이 똬리를 틀었다.

하지만 그는 요리에 대한 갈증이 풀리지 않았다 한다. 반가요리 전문가로 유명한 고 강인희 선생에게 요리를 배우면서 한국 음식의 맛과 멋에 푹 빠져 버린 그는 ‘한국 음식의 세계화’에 눈길을 돌렸다. 식당을 그만두고 프랑스, 일본 등지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푸드 스타일링을 공부했다.

현재 그는 푸드 스타일링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한류음식문화연구원 원장도 겸하고 있다. 외국 행사에 초빙돼 한국 음식을 알리는가 하면, 밥 김치 샌드위치 등 외국인을 위한 한국 음식 개발에도 열심이다.

그의 요리는 그의 인생처럼 때론 화려하고 때론 소박했다.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수진 원장. 인터뷰 내내 그에게선 엄마 냄새가 났다.

사진 : 이창재
  • 200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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