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면 유타대 명예교수

이국생활 반세기 결산, 아리랑 기행 다니는 원로 지리학자

기울어 가는 조국을 떠나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까지 와서 떠돌던 유민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아리랑 연구로 이어졌다. 시기도 상황도 다르지만, 그 역시 이국생활의 설움을 아리랑으로 풀었기 때문이다. “제게 아리랑은 재출발을 위한 응원가와 같았어요. 슬픔과 절망의 계곡을 빠져나오게 하는, 위로 밀어 올리는 힘을 느끼거든요.”
우리 민족 밑바닥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정서를 담은 노래 ‘아리랑’. 여든이 넘은 1세대 지리학자가 아리랑의 흔적을 찾아 기행을 하고 있다. 미국 유타대학 명예교수인 이정면 박사(82세). 1957년 지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났던 그는 일본과 말레이시아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다. 그렇게 해외를 떠돈 게 반세기. 이국생활 동안 아리랑 가락이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는 그는 2005년 아리랑의 본고장을 찾아 귀국했다. 정선, 밀양, 진도를 돌며 애절한 가락을 들을 때면 이국생활에서 받은 차별과 고립감, 역경에서 헤어 나오려는 안간힘을 대변하는 듯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과 유럽, 동남아 등 세계 각국으로 흩어진 한국인의 삶 속에 스며든 아리랑의 흔적을 좇아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이지출판 간)을 펴냈다.

책 출간을 위해 잠시 한국에 머물렀던 이정면 박사를 출국 직전에 만났다. 일제 강점기와 2차 세계대전, 6?5 등 역사의 격변기를 모두 겪어 낸 세대. 그의 삶 자체가 아리랑과 맞닿아 있는 듯했다. 아리랑에 대한 그의 첫 기억은 예닐곱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형과 함께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다니곤 했는데, 주린 배로 고개를 넘어올 때면 귀동냥으로 들은 ‘아리랑’이 절로 나왔다. 그게 그의 ‘아리랑 고개’였다. 나무 지게를 벗어 놓고 소학교에 들어간 것은 열 살 때. 어머니가 7남매 중 여섯째인 그를 보고 “이 놈은 공부시켜야겠다”며 학교에 가라고 했다. 나이가 많아 2학년에 편입했는데, 일본말로 하는 수업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향학열을 불태운 것이 그때부터였다. 결국 1등을 도맡아 하게 됐고, “너 같은 애가 선생을 해야 한다”는 소리에 광주사범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그래도 시골학교 출신이 합격할 것은 기대도 안 했다. 부급장이 대신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갔다. 합격이면 웃옷을 벗어 흔들면서 교문에 들어오기로 했는데, 합격이었다.

지리학자가 되겠다는 꿈은 광주사범 시절 시작됐다. 일본인 지리 선생님이 분필로 쓱쓱 지도를 그리며 칠판에 세상을 앉혀 놓는 것을 보고 매혹당했다. 넓은 세계를 보여 주면서 학생들을 감동시키는 스승이 되고 싶었다. 광주사범 졸업 후 교사 생활을 하다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해 지리를 전공했다. 그런데 스승이 없었다. ‘지리’를 공부한다고 하면 “대전역 다음은 무슨 역입니까?”라고 놀릴 정도로 우리나라에 지리학이 자리 잡지 않았던 때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공부하는지 알고 싶었고, 유학을 가는 게 꿈이었다. 일단 외국으로 나가 보자는 생각에 외교관 시험을 준비하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붙들리기도 했다. 그렇게 염원하던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은 1957년. 아시아 파운데이션의 장학금을 받아서였다. 아내와 아이들을 처가에 맡기고 무작정 떠났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강했다.


1년짜리 장학금이었는데, 주임교수가 “박사학위 할 생각이 있는가?” 묻더니 장학금을 연장해 주어 꿈에도 그리던 지리학 박사가 됐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가르치고 싶다는 꿈도 이뤘다. 일본과 말레이시아를 거쳐 미국의 교수로 정착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에 초빙교수로 왔는데, 그게 3년까지 연장돼 강의하다 종신교수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종신교수가 되기 위해 9년을 기다렸다며 반발하는 미국인을 보고, “남 울리며 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유타대에 지원해 사흘간의 인터뷰와 공개 강의 등 엄격한 심사를 거쳐 교수로 임용됐다. 그는 정성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교는 그의 정년을 예외적으로 65세에서 77세로 연장시켰다. 2002년 정년퇴임한 후에도 명예교수로 매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간다. 일본인 교사가 심어 준 지리학자의 꿈. 그는 그 꿈을 이루면서 세계 곳곳에 제자를 둔 스승이 됐다.


지리학자의 꿈 심어 준 일본인 선생님

“일본에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절을 하시더니 ‘그때 내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자네한테 헛소리를 했네’하며 사과를 하시더라고요. 선생님 덕에 내가 이렇게 됐는데 무슨 말씀이냐고 했지요. 선생님은 ‘내 제자가 세계적인 지리학자가 됐다’며 자랑을 많이 하신다더군요.”


그는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국경을 초월하는 일이라며, “남을 가르치는 것은 인종과 국적 관계없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그는 사범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에서 시작해 중겙玆紵閨?교사와 대학교수까지 모든 학교의 선생님을 다 해봤다. 시골 소학교 교사 시절에는 공부와는 담쌓고 지내던 아이들에게까지 의욕을 불어넣어 무더기로 중학교에 진학시켰다. 해방 후 그는 일제 강점기에 교사를 했던 게 마음에 걸려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짐을 실은 트럭 앞을 아이들이 막아섰다.

격동기를 살아온 그의 삶 자체가 “의지만 있다면 불가능한 게 없다”는 것을 역설하는 드라마다. 일본 군대에 징집돼 부대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해방을 맞았고, 6?5 전쟁 통도 천운으로 피할 수 있었다. 서울대에 다니며 외교관이 되겠다고 고등고시를 준비할 때였다. 각혈을 하고 병원을 찾았더니 폐결핵 3기라 했다. “시험이나 보고 죽어야겠다”고 공부할 것을 싸들고 여수의 절로 들어간 것이 1950년 6월 23일. 전쟁이 나자 섬으로 들어가 그곳에서도 공부를 계속했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는 병원의 진단서를 보이자 “잘 치료하라”며 순순히 물러났다. 훗날 확인하니 의사가 기관지염을 폐결핵으로 오진한 것인데, 오진이 그를 살린 셈이다. “내일 당장 죽더라도 지금은 공부한다”는 그의 의지는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상황에서 길을 만들었다. 제자들에게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말고 시도하고, 시도하고 또 시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는 그러나 이국에서의 생활을 ‘百忍有德’(백 번 참으면 덕이 있다)으로 집약한다. 짓밟혀도 인내하고 양보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이 때문일까. 그는 우리나라를 떠나 이국을 떠돈 사람들에게 관심이 갔고, 이민사를 연구했다. 유타의 한 묘지에서 찾아낸 한국인 ‘유공우’의 묘지. 비석에는 “1872년에 태어나 1924년 3월 8일 캐슬 게이트 광산 폭발사고로 사망했다”고 새겨져 있었다. 추적 끝에 그가 스물두 살 때 아내와 네 살 된 아들을 남겨 두고 고향인 경기도 포천을 떠나 미국에 왔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기울어 가는 조국을 떠나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까지 와서 떠돌던 유민들에 대한 관심은 아리랑 연구로 이어졌다. 시기도 상황도 다르지만, 그 역시 이국생활의 설움을 아리랑으로 풀었기 때문이다.

“제게 아리랑은 재출발을 위한 응원가와 같았어요. 슬픔과 절망의 계곡을 빠져나오게 하는, 위로 밀어 올리는 힘을 느끼거든요.”

그는 고국의 눈부시게 발전된 모습이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물질만능으로 흐르면서 우리 민족을 꿋꿋이 살아가게 했던 ‘얼’을 잊고 있는 게 안타깝다고 한다. 그걸 되살리고 싶은 게 이 노학자의 바람이다. 이 박사는 ‘1925년 생’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얼굴에 에너지가 넘쳤다. 비결을 묻자 ‘하심(下心: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이라고 대답한다. “속이 다 비어서 멍청하지” 하면서. 그는 떠나는 날 공항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함께 이야기를 나눠서 너무 고마웠고, 다음번에 오면 다시 보자고 했다. 누구에게든 자신을 먼저 낮춰 정성으로 대하는, 그의 사람을 제일 중시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사진 : 장성용
  • 2007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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