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 여성 어름사니 박지나

줄 위에 제 인생을 걸었어요

3m 높이의 팽팽한 외줄 위에서 제 집 안방인 양 잰걸음으로 걷고 달리고 공중회전까지 하는 어름사니의 묘기를 본 적이 있는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마조마해질 일이다. 어름사니는 남사당패에서 줄을 타는 줄꾼을 말한다. 줄타기를 남사당 말로 ‘얼음’이라 하는데 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고 위험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사니’는 사람과 신의 중간이라는 뜻이다. 현재 전 세계에 존재하는 줄타기 고수는 40~50명 정도. 국내에는 10여 명이 활동 중이다.

“줄 위에 오르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아요. 최고가 된 기분이죠. 신들린 사람처럼 힘이 솟아난다니까요.”(웃음)

박지나 양(20세)은 전국에서 단 두 명뿐인 여자 어름사니 중 한 명이다. 올해로 경력 8년째. 공연을 할 때면 긴 머리를 틀어 올려 패랭이 속에 감추고 남자 복장을 하지만, 뽀얀 피부와 앵두 같은 입술 때문에 고운 소녀 티가 물씬 풍긴다. 박 양이 활동하고 있는 경기도 안성시립 바우덕이 풍물단에서는 그를 두고 ‘남사당의 꽃’이라 부른다.

박 양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줄타기를 시작했다. 남사당 전수관이 여성으로서는 유일무이하게 사당패 우두머리인 꼭두쇠에 오른 전설적인 인물 바우덕이의 전통을 잇기 위해 처음으로 여자 어름사니를 뽑았을 때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풍물놀이반에 들었는데 그때 강사 선생님이 바우덕이 풍물단 단원이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남사당 전수관에 다니게 되었는데 줄타기를 보고 그만 첫눈에 반했죠. 하늘 위로 덩실덩실 솟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날아다니는 천사 같았거든요.”

박 양은 열 살의 나이에 줄 위의 인생을 결심했다. 그 후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를 설득하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광대 인생’이라 하면 그저 힘들고 서글픈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있는 것이 사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그 길을 가겠다니 부모 된 입장에서 흔쾌히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거는 꼭 해야 하거든요. 부모님은 언니나 동생처럼 저도 음악이나 무용을 하기 바라셨지만 ‘줄’이 좋은 걸 어떡해요.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남사당이라 하면 부모 없는 아이들이 따라다니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줄을 타는 저를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관객들도 있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저뿐만 아니라 이곳 바우덕이 풍물단에는 우리 전통문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청소년들이 많아요.”

박 양이 줄타기를 배우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스스로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 최정상에 오르기까지는 절대 가족에게 힘들다거나 포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지금까지 내색하지 않고 잘 견디고 있다”고 웃는다.

현재 박 양이 구사할 줄 아는 기술은 스무 가지 정도. 영화 <왕의 남자>의 마지막 장면으로 유명한 ‘양발 끝으로 코 차기’도 마스터했다. 안성시립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은 4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상설 공연을 한다. 이 기간에는 외부 공연도 잦아 바쁜 스케줄 탓에 연습할 시간이 없을 정도다. 12월부터 3월까지 연습에 집중하는데, 이때는 매일 아침 10시부터 밤 12시까지 꼬박 연습을 한다.


부모 설득 후 남사당에서 줄타기 훈련

박 양은 “나에게는 오로지 이 길뿐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다”며 “한편으론 다른 길을 못 가본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고 말한다. 남사당 마당놀이에는 풍물, 버나(대접·대야 돌리기), 살판(공중제비),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줄타기 등 여섯 마당이 있다. 그중에서도 줄타기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아찔하기 때문에 관객들이 가장 좋아한다. 박 양은 열네 살이 되던 해부터 공연 무대에 올라갔다. 앳된 얼굴의 여자 아이가 외줄 위를 신명나게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떨면 관객들 사이에서는 “어허허, 그놈 참” 하며 웃음과 박수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공연을 할 때 줄이 얼마나 높이 매달려 있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돼요. 관객들을 내가 잡아먹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잡아먹힐 것인가 그것이 가장 무섭죠. 충분히 연습을 했을 때는 줄 위에 올라가기 전부터 자신이 있어요. 첫 대사에 그날 공연이 좌우되죠. 준비가 제대로 안 됐을 때는 재담을 하면서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요. 줄과 제가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관객들도 보이고 매호씨랑 농담도 하고 돌발적인 재간도 부릴 수가 있지요.”

올해 중앙대 음악극과에 입학한 박 양은 줄타기를 주제로 한 뮤지컬을 제작하고 싶단다.
매호씨는 남사당에서 어름사니와 재담을 주고받는 어릿광대를 말한다. 줄타기에서 줄 타는 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재담. 재담은 윗대부터 내려오는 기본 틀에 말솜씨를 더해 만드는데, 어름사니의 재치와 순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는“지금도 가끔 매호씨가 옛날 말을 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며 “아직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귀띔한다.

줄에서 뛰어올랐다 내려앉을 때는 오른쪽 엉덩이 가운데 부분에 걸쳐 앉는다. 이때 줄에 스치면서 오른쪽 엉덩이의 피부가 수없이 벗겨졌다 아물다 하면서 흉터가 남는다. 발바닥뿐 아니라 늘 부채를 쥐어야 하는 오른 손바닥 한가운데도 굳은살이 단단히 박혔다. 공연 중 줄 위에서 떨어진 적도 여러 번이다. 갑자기 비가 내리는데도 계속 공연하다 미끄러져 떨어진 적도 있었다. 다행히 바닥에 매트가 깔려있어서 타박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박 양은 올해 중앙대학교 음악극과에 입학했다.

“줄타기도 하나의 극인데, 여태까지는 줄타기만 배웠을 뿐 소리나 극적인 요소들을 훈련받지 못했어요. 지금까지는 제가 어리니까 서툴러도 관객들이 귀엽게 봐주었지만 이제는 성인이 됐으니 완벽한 실력을 갖춰야지요.”

안성시립 바우덕이의 야외 공연.
어떤 이들은 그를 “줄 위의 보아”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바우덕이의 환생”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박 양에게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찬사다.

“보아도 좋고 바우덕이의 환생도 좋지만 그 이름들에 제가 묻히는 것은 싫어요.‘줄타기 하면 어름사니 박지나’라는 제 이름 석자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박 양의 꿈은 줄타기 고수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 줄타기를 주제로 한 마당극이나 뮤지컬을 제작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고 욕심을 말한다.

사진 : 신규철
  • 2007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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