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소리 없이 대화가 많은 가족

청각장애인 아내 위해 수화 책 펴낸 정택진 씨

이들 가족은 정말 대화가 많았다. 서로 눈을 맞추면서 수다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데 소란하지는 않았다. 정택진, 이주순 부부와 고등학생 아들 정미문. 옆에서 보기에도 사랑이 넘쳐나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수화(手話)였다. 이 집 주부인 이주순 씨만 청각장애인이지만 듣는 데 문제가 없는 아버지와 아들도 수화로 의사소통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이들 가족은 얼마 전 수화 책《프리미엄 수화》를 펴냈다. 7년 전 정택진 씨가 아내를 위해 만들었던 노트가 책으로 발전한 것이다. 아내는 어휘력이 부족했다. 수화에 복잡한 개념의 말은 없거나 있어도 잘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운전면허시험을 볼 때마다 떨어지는 아내를 지켜보다 정택진 씨는 아내만을 위한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덕에 17전 18기로 아내는 시험을 통과했다. 정택진 씨는 청각장애인과 정상인 사이 수화라는 다리를 놓고, 청각장애인의 어휘력을 넓혀 주기 위해 수화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초 자료를 만든 후 출판사를 물색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을지 글로벌’의 오명균 사장. 그의 아버지 역시 청각장애인으로, 그의 동생인 고등학교 교사 오석균 씨도 알고 보니 정택진 씨에게 수화를 배운 제자였다. 그 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정택진 씨 가족과 오석균 씨,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모델이 돼 수화 사진을 찍었다.

각 수화마다 상황에 따른 용례와 유의어를 덧붙여 놓아 청각장애인들의 언어생활을 풍성하게 만든 게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이 책에는 청각장애인 아내가 감정과 의사표현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도우려는 저자의 사랑이 담겨 있다. 경기도 부평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정택진 씨는 연신 머리를 매만져 주거나 옷깃을 바로잡아 주며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열애에 빠진 연인 같은 모습이라 “만난 지 몇 년째”냐고 물었더니 21년 된 사이란다.

수화로 "I love you"라고 하는 정택진, 이주순 씨 부부와 아들 정미문 군.
오래된 부부의 특별한 사랑만큼이나 두 사람의 만남도 특별했다. 대한항공 항공정비사였던 정택진 씨는 이주순 씨를 만난 후 안정된 직장을 버렸다. 대신 최고의 수화통역사가 돼 청각장애인들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청각장애인 고아들이 모여 사는 부평의 사회복지법인 성동원에서였다. 이주순 씨는 그곳에서 성장한 후 성인이 돼 나갔다 갑상선 질환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정택진 씨는 주말마다 그곳을 찾는 자원봉사자였다.

“그곳에서 눈이 맞아 4년 동안 사귀었지요.”

어떤 모습에 반했냐고 물으니 두 사람은 “마음이 예뻤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다. 정택진 씨는 그곳 동생들을 엄마처럼 아끼는 이주순 씨 모습이, 이주순 씨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식구처럼 어울리는 정택진 씨 모습이 좋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그러나 순조롭지 않았다. 정택진 씨 가족은 “하필 네가 그런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반대했고, 이주순 씨 친구들은 “결국에는 버림받고 말 것”이라며 말렸다. 실제 청각장애인과 정상인 사이 결혼이 이혼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두 사람은 갈등 속에 헤어짐과 만남을 거듭했다. 결국 정택진 씨는 6년 동안 다니던 대한항공을 나와 성동원의 생활지도 교사로 들어갔다.

“어느 날 밤이었어요. 제 숙소인 1층에서 아내 숙소가 있는 3층까지 뛰어 올라가 무릎을 꿇고 ‘당신의 귀와 입이 되겠습니다’라고 수화로 했어요. 그제야 아내가 펑펑 울며 제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봉사와 함께 시작됐다. 한 목사님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전신마비 장애인들을 도우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아들도 얻었다. 그러나 친구들과 떨어진 아내는 우울해했고, 2년 후 다시 성동원으로 들어갔다.


청각장애인 아내와 결혼 위해 직장 버려

1년 후 독립한 이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정택진 씨는 택시운전, 식당일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도 청각장애인들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스스로를 변호하지 못해 억울하게 경찰서에 잡혀 있거나, 사고로 응급처치를 받아야 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등 그가 뛰어가야 할 곳은 많았다. 수십 년간 대화가 단절되어 있던 청각장애인 아들과 정상인 아버지가 그의 통역으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하룻밤 만에 벽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병원 응급실에서 통역을 하고 나설 때면 ‘한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생각에 날아갈 것 같지요.”

그는 왜 자신의 생활을 팽개치면서까지 남 돕는 일에 엔도르핀이 솟을까? 캐물으니 “내게도 아픔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여섯 살 때 김일 선수의 레슬링을 흉내 내다 다리를 다친 그는 다리가 저려 몸을 구부린 채 잠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걸 통해 아픔과 사랑을 알게 됐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됐다고 한다. 내내 그의 다리를 주무르며 안타까워하던 어머니의 사랑을 그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기 앞가림 잘하는 아이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을 생각해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배달, 신문팔이에 구두닦이를 도와 신발을 거둬 오는 찍새 노릇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 돈벌이가 확실한 항공정비사가 되기로 목표를 세웠다. 정석항공공업고등학교 항공정비과에 입학한 그는 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1983년 대한항공에 특채됐다. 그러나 1984년 수화를 배워 자원봉사를 하고, 아내를 만나면서 삶의 방향이 180도 전환됐다. 아내를 만났을 때 그는 스물셋, 아내는 열아홉 살이었다.

“20대 중반 정말 무섭게 고민했어요. 삶이 무엇인지, 나란 존재가 무엇인지. 그러다 내린 결론이 이 사람만큼은 내가 책임진다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좋은 직장을 다니는 당신과 나는 안 맞다”고 자신 없어 하는 아내를 보고 1988년 직장을 버렸고, 이듬해 결혼했다. 그 후 그와 아내는 병원, 응급실, 경찰, 법원에서부터 은행 심부름까지 청각장애인들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생활 무대가 같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요즘도 만나서는 수화로, 떨어져 있을 때는 수없이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낮밤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지만 아내는 “날 이용해 돈 벌 생각 마라”며 수고비를 못 받게 한다.

1995년 정택진 씨가 어릴 적 다친 다리 때문에 인공 관절을 박아 넣는 수술을 하던 때 100여 명의 청각장애인들이 문병을 왔다. 그들은 7,000원, 1만 원, 1만 5,000원 등 꼬깃꼬깃한 돈을 놓고 갔다. 한 달 내내 일해 60만~70만 원 받는 이들이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아는 부부는 서로 붙들고 한참 울었다고 한다.

아내와 생활하며 최고의 수화통역사가 된 정택진 씨는 1999년부터 KBS 프로그램 〈사랑의 가족〉에서 수화통역을 맡고 있다. 그동안 더 전문적으로 봉사하고 싶어 한국 재활복지대 수화통역과와 경희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가톨릭대학원 장애인복지학과에서 공부 중이다.

그에게 부부사랑을 유지하는 비결을 물었더니 ‘뽀대감봉’이라고 대답한다. 뽀뽀하고, 대화하고, 감사하고, 봉사하라는 말이었다. 이들 부부는 요즘도 아침저녁 수시로 뽀뽀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1분 정도씩 서로 안아 준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한번 가만히 안아 보세요. 가슴은 거짓말을 못 하니 서로 거짓이 있을 수 없지요.” ■
  • 2006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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