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아이들 공부 시키다 박사 됐어요”

한국 복식 연구가 이태옥 씨

아이들 공부를 돕다 박사 학위까지 받은 주부가 있다. 올봄 인하대에서 〈조선왕조 말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우리나라 저고리에 대한 실증적 변천〉이라는 논문으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태옥 씨. 그는 대구 제일여상 졸업 후 전자회사 경리로 일하다 결혼해 줄곧 전업주부로 살고 있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대신 직접 가르치다 공부에 맛을 들였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 복식을 공부하게 됐다. 전공을 살려 한복집도 열었다.

서울 강서구 방화동,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태옥 한복’을 찾았을 때 리본을 단 화분이 입구에 주르르 놓여 있었다. 그의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화분이었다. 밤색 치마에 연두색 저고리를 받쳐 입은 이 씨가 명함을 내밀었다. 전통기와와 족두리 쓴 여인을 형상화한 그림을 배경으로 ‘이학 박사 이태옥’이라는 글자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인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던 날. 왼쪽부터 차남 윤홍균씨 부부. 이태옥씨. 남편 윤동진씨
‘이학 박사 이태옥’을 만든 것은 아이들이었다. 1981년 그는 서울 아현동에서 개화동으로 이사했다. 다섯 살, 일곱 살이었던 두 아들이 자연에서 뛰놀며 호연지기를 키우기 바라서였다. 경기도와 접한 개화동은 그때만 해도 시골과 다름없었다. 수도공고 교사였던 남편 윤동진 씨는 개포동 학교까지 출퇴근하는 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사하고 보니 그 동네에는 학원이라곤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 따로 공부하는데…’라는 생각에 은근히 불안해진 이 씨는 이때부터 두 아들의 과외 선생으로 나섰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이들 일기에 댓글을 달아 주는 식으로 지도했어요. 큰아이가 쓴 일기 밑에 정성껏 글을 써 줬더니 유치원생인 둘째도 샘이 났는지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하더군요.”

아이들은 일기를 쓸 때마다 ‘오늘은 뭘 써야 하나?’가 늘 고민이었다. 그러면서도 초등학교 내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그러는 동안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커진 것 같다고 이 씨는 말한다. 곁에 있던 남편 윤동진 씨는 “우리 부부는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 손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며 “아이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인 것 같다”고 말한다.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도시락을 싸서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 도시락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 아이들이 숙제를 하는 동안 이태옥 씨는 옆에서 아이들의 연필을 깎아 줬다. 엄마가 자신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서른여섯에 대학 진학

그리고 자신도 아이들 옆에서 깎아 놓은 연필로 가계부를 쓰거나 성경을 읽었다. 성경을 계속 읽다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자는 생각에 2년 동안 신학교에 다닌 그는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대학 입시에서 두 번 낙방한 후 전공을 바꿔 방송통신대학 가정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일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한국 복식 전문가가 될 줄은 몰랐다.

“저희 외할머니가 한복 짓는 솜씨가 탁월했어요. 일찌감치 홀로 되신 후 한복 짓는 일로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셨죠. 저도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곁에서 재봉질을 하며 놀았는데, 그 일이 무척 고생스러워 보이더라고요. ‘태옥이는 손이 야무지니까 나중에 커서 옷을 지으면 좋겠다’는 할머니의 칭찬에 고개를 젓곤 했죠.”

방송통신대에 다니면서 이 씨는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가정학과에서 의류학을 전공, 패션 마케팅 쪽을 공부하던 그는 건국대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면서 한국 복식 쪽으로 진로를 굳혔다. 지도 교수는 그가 과제로 제출한 작품을 보고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학자가 될 수 있겠다”고 북돋웠고, 대학원 진학과 함께 한복집도 열었다.

생활한복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방송통신대와 계명대, 인하대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오래된 한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전국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새벽에 집을 나서 밤늦게 들어오곤 했다. 혼수철인 봄, 가을엔 일이 몰리는 데다 공부를 병행하느라 하루 4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 3 아들이 엄마를 챙길 지경이 됐다.

“우리 집에서는 제가 늘 수험생이었어요. 고 3 아들이 엄마 밤참 먹으라며 라면 끓여다 주고, 사과 깎아 주고 했으니까요. 자기들 힘든 것은 뒷전이고, 뒤늦게 공부하는 엄마를 안쓰러워하며 저만 보면 ‘엄마, 이제 그만하고 주무세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어요.”

아이들에게는 ‘공부하는 엄마’가 최선의 교육이었다. 엄마를 보면서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니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필요 없었다. 아이들은 과외 교육 한번 안 받고도 앞길을 잘 헤쳐 나갔다. 장남 홍표 씨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후 미국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차남 홍균 씨는 중앙대 의대를 마친 후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신경정신과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다. 윤동진 씨는 그 공을 아내에게 돌린다.

두 아들 홍표(맨 오른쪽), 홍균(왼쪽 두번째)씨와 함께 한 부부.
“저희 집 애들은 중학교 때까지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어요. 둘 다 과학고 입시에 실패했는데,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분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애들 엄마 덕인 것 같아요. 본인이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데다 늘 아이들을 믿어 줬으니까요. 미국에 있는 큰애가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냥 믿고 허락했을 정도였죠.”

이제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장남 홍표 씨가 얼마 전 인터넷 가족 카페에 올린 두 편의 글을 이 씨는 프린트해서 보여 줬다. 편지 형식의 그 글에는 어린 시절 연을 만들며 놀던 아버지와의 추억과 자신을 늘 믿어 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박사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문구도 눈에 띄었다. 이태옥 씨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근대 복식사’를 복원하기 위해 19세기 이후 한복을 800여 점 수집했다. “열아홉 꽃 같은 나이에 시집 올 때 입었던 옷”이라며 아흔 넘은 할머니들이 고이 간직해 온 한복을 얻어 오면서 그는 사례와 함께 비단 한복을 정성껏 지어 드리기도 했다. 이 수집품들을 분류하고 분석하면서 박사 논문이 나왔다. 이 씨의 꿈은 수집한 옛 옷들을 바탕으로 근대 복식을 재현하고, 이를 전시할 작은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
  • 2006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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