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사랑에 빠진 영국인 킬번 씨

“한옥은 내 영혼의 집입니다”

한국인보다 한옥을 더 사랑한다는 영국인 데이비드 킬번 씨(63세). “한옥과 사랑에 빠졌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의 가회동 집으로 가는 길은 옛 정취가 물씬 났다.

꼬불꼬불한 언덕길에 전통 한옥이 옹기종기 양쪽으로 즐비하게 서 있는 가회동 31번가. 가파른 언덕이 이어지는 좁다란 골목 어귀에 유난히 축대를 높이 쌓고 지어 왠지 도도해 보이는 한옥이 그의 보금자리이다.

이중으로 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담한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항아리와 화분들, 호탕하게 웃고 있는 달마 석상과 한 쌍의 해태 석상 등이 눈에 들어온다. 킬번 씨가 그의 한국인 부인 최금옥 씨(51세)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디자인하여 만들었다는 쪽마루 끝 나무 난간이 아기자기한 맛을 더한다.

돌계단을 올라 들어선 대청마루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나무 소파가 놓여 있었다. 김기덕 감독에게 2004년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의 영예를 안겨 준 영화 〈빈집〉에서 여주인공 선화 역을 맡은 이승연이 대낮에 슬쩍 들어와 오수(午睡)를 즐기고 간 바로 그 소파이다.

“어느 날 낮에 누가 대문을 막 두드리더라고요. 김기덕 감독의 조수였는데, 집을 영화촬영 장소로 사용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인터넷으로 김 감독에 대해 알아본 뒤 곧바로 오케이를 했지요.”

폭력적인 남편 밑에서 고통스러워하던 여주인공 선화가 달콤한 잠을 자고 간 그 집. 킬번 씨는 선화와 똑같은 말을 했다.

“이 집에서 자면 잠이 너무 달콤해요. 꽃향기, 바람 소리, 은은히 쏟아지는 달빛, 이런 것들을 느끼며 우주와 하나 된 기분으로 너무나도 편안하게 잘 수 있어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이자 차(茶)판매상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런던과 도쿄에도 집이 있지만, 이런 ‘행복한 느낌’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다고 털어놓았다. 잦은 해외출장과 여행을 마치고 이 집으로 돌아오면 늘 기쁘고 행복해진다고 했다.

그가 한옥에 처음 매료된 것은 19년 전인 1987년이다.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발간되는 광고마케팅 전문잡지의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던 그는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특집을 기획하면서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갓 결혼한 한국인 부인과 함께였다. 그때 난생처음 본 한옥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집을 네 채가량 본 뒤 지금의 집을 고르고 그 자리에서 계약금까지 치렀다.

“이 집에서 아주 특별한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1920년대 지어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이후 그는 전기선을 손보고, 가스를 이용한 중앙난방을 설치했다. 움푹 들어간 재래식 부엌을 원래 모양대로 살려 목욕탕과 화장실을 만들고, 부엌도 새로 꾸미고, 나무 난간을 설치한 것 말고는 집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대신 봄여름으로 기와를 손질하고 마당을 꾸미면서 한옥 생활을 즐겨 왔다.

그는 한옥이 “선이 무척 아름다운 데다 건축법도 뛰어나고, 나무와 흙·종이·돌 같은 자연 소재로 지어져 집 자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예찬했다. 그가 이 집에서 늘 느낀다고 하는 ‘에너지’ 혹은 ‘기’(氣)도 이 집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의미에서 북촌(北村)이라고 불리는 계동과 재동, 가회동, 삼청동, 원서동 일대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궁궐 다음으로 풍수가 좋아 고관대작들이 집을 짓고 살던 지역이다.

킬번과 최금옥 씨는 영국 런던의 한 일본 음식점에서 만났다. 1986년 일본에서 일하던 중 1주일간 틈을 내어 런던을 방문한 그는 영국 유학생으로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최 씨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제이드(최금옥 씨의 영어 이름)를 보자마자 그에게 투지(fighting spirit)가 있다는 걸 알았죠. 어떤 역경도 헤쳐 갈 힘이 있다는 뜻이에요. 저처럼 전 세계를 헤집고 다니며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최 씨는 보자마자 프러포즈하는 그를 버거워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전화와 편지 공세를 퍼부어 1년 후 결국 결혼 승낙을 얻어 냈다. 부인 최씨는 “마흔 살도 넘은 총각이 너무 진지해서 진짜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한국 여성을 평생의 반려자로 삼고 한옥을 ‘영혼(靈魂)의 집’으로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는 그렇다고 한국문화 지상주의자는 아니다. 광고계에서 15년, 언론계에서 20여 년 일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닌 그에게 문화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고유성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하는 대상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문화든, 독특한(unique) 데에 존재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영화 [빈집]에서 여주인공이 낮잠을 즐긴 소파 위에 앉은 킬번 씨 부부
대학에서 토양(土壤)화학과 심리학이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를 전공하고(본인은 두 가지가 연결된다고 주장하지만), 젊은 시절 인도 여행을 통해 비서구 세계의 찬란한 문화에 눈뜬 그는 세계적인 광고회사 ‘오길비앤드마더’의 두바이 지사장 등을 거치면서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다. 1984년에는 일본에서 살고 싶은 마음에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광고마케팅 주간지 〈애드버타이징 에이지〉 특파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는 흙에 대한 지식을 살려 스리랑카에 차밭을 운영하며 차를 생산,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는 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번꼴로 주거지를 옮기며 일을 해 온 ‘유목민’이다.

한옥은 유목민인 그가 몸과 마음의 안식을 찾는 곳이다. 그러나 요즘 그는 무척 마음이 울적하고 괴롭다고 했다. 2001년 시작된 서울시의 ‘북촌 가꾸기 사업’으로 그의 뒷집과 옆집, 앞집, 또 그 옆집이 모두 공사 중이다. 바로 옆에서 지하 10m씩 파 들어가는 굴착 공사를 하는 통에 그의 대청마루와 목욕탕 벽에는 깊은 균열이 생겼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애초의 취지와 달리 한옥의 원형을 훼손하는 개·보수가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붕만 기와로 얹는다고 한옥인가요. 뼈대를 콘크리트, 철근으로 바꾸고 2층만 한옥인 기형적인 집이 버젓이 지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식당, 노래방으로 변경할 수 있도록 허가가 나고 있어요.”

종로구청을 수없이 찾아가고 대통령과 서울시장에게 편지도 썼지만 돌아오는 답신은 “개겫맑?절차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내용뿐이었다. 작년부터 부부가 함께 ‘kahoidong.com’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가회동 난개발 현장을 고발하고 한옥 보존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크게 효과가 없는 것 같다고 허탈해했다.

“이 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면… 저의 남은 인생은 행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겨우 보존되어 온 한옥마을의 아름다운 원형을 지키지 못한다면 먼 훗날, 후손들이 한옥에 대해 물을 때 도대체 뭐라고 대답할 거냐고 그는 되물었다. ■
  • 2006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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