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 새로운 사명 찾았어요”-9년째 선교활동 ‘탁구 여왕’ 양영자

양영자 씨 가족. 왼쪽부터 양영자 씨, 큰딸 반재, 작은 딸 윤재, 남편 이영철 씨.
1980년대 한국 여자 탁구의 간판으로 활약했던 양영자 씨(42세)가 몽골로 선교하러 떠난 지 9년 만에 일시 귀국했다. 1987년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 복식 우승,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 등 그는 후배 현정화와 함께 ‘환상의 탁구 복식조’로 세계에 이름을 떨쳤던 인물. 탁구를 좋아했던 지금의 40, 50대들은 우승 후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하던 그의 모습을 인상 깊게 떠올릴 것이다. 그는 국내 스포츠계에서 소문난 크리스천이었다. 현정화나 홍차옥 등 많은 탁구 스타들을 기독교로 인도한 이도 양영자 씨였다고 한다.

그런 양 씨가 녹색 테이블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1990년 말 남편 이영철 씨와 결혼하면서다. 연합뉴스 기자 출신인 남편은 당시 총신대 대학원에서 목회자 과정을 밟고 있었다. 교회에서 만나 결혼한 이 커플은 연애 시절부터 “오지에 가서 선교 활동을 하자”고 굳게 약속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몽골로 떠났다.

안식년을 맞아 일시 귀국한 양영자 씨를 선릉역 부근의 한 오피스텔 앞에서 만났다. 몽골로 떠날 당시 다섯 살, 네 살이었던 두 딸은 어느새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의 고등학생으로 성장했다. 2003년 귀국해 대전의 크리스천 국제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양씨 부부가 6개월 동안의 선교 훈련원 과정을 거쳐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떠난 것은 1997년 3월. 현지에 도착한 후 그의 가족은 독일, 홍콩, 영국, 스위스 등지에서 온 선교사 가정과 함께 2년 동안 언어 교육을 받으며 교회 개척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나이 지긋한 몽골인 목사가 지부 설립을 위해 고비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지 마을을 왕복하다 폐렴에 걸리자 양씨 부부가 대신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그때의 상황을 양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솔직히 몽골 오지가 어떤 곳인지 당시에는 잘 몰랐어요. 울란바토르는 생활문화가 한국의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거든요. 저희 부부가 겁도 없이 오지 마을에 자원한 것은 신앙의 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더 자라기 전에 시골 생활을 경험하게 하자는 생각도 있었어요.”

사회주의 잔재가 남아 있는 몽골에서 외국인이 지방을 방문하려면 별도의 비자가 필요했다. 그는 “탁구가 아니었다면 비자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그 지역 초등학교 탁구 교사로 봉사하겠다고 하니까 겨우 비자를 발급해 주더라는 것이다.

그들 가족은 2000년 초 울란바토르에서 450㎞ 떨어져 있는 몽골의 중소도시 사인샨드에 도착했다. 척박한 황야에 세워진 사인샨드는 전체 인구가 1만 2,000명에 불과한 곳으로 주민의 대부분이 라마불교 신자였다. 작은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판잣집과 천막집이 즐비한 이곳 사람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은 양, 말, 낙타, 염소 등을 키우는 일이었다. 전통적 유목민의 후예인 이들은 식구가 많든 적든 한 천막 안에서 살면서 잘 씻지도 않았다. 이들의 생활에 적응한다는 게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시내에 아파트를 하나 얻어 우리 식구 살림집 겸 선교 장소로 활용했는데, 신도들이 다녀간 후에는 냄새 때문에 몇 시간씩 방문을 열어 놓아야 했어요.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방문하는 사람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고, 뭘 주어도 도무지 감사할 줄 몰라 기운이 빠지곤 했죠. 유목민 문화가 강하게 남아서 성 윤리라든가 도덕성이 약해 낙태를 밥 먹듯이 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기후 조건이라든가 교통의 불편함쯤은 얼마든지 참겠는데 문화 차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정말 견디기 힘들더군요.”


안면근육 마비 후 깨달음 얻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소녀가 얼마 후 아무 거리낌 없이 절에서 부적을 사 와 펼쳐 보였을 때는 기가 막혔다고 한다. ‘내가 왜 이 머나먼 오지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후회와 함께 이질적인 그들의 문화와 삶에 회의를 느낄 즈음 시련이 닥쳤다. 왼쪽 얼굴이 갑자기 마비되어 눈을 뜰 수가 없고, 밥을 먹어도 절반 이상은 흘리는 구안와사 증상을 겪게 된 것이다. 그는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두 달 동안 울란바토르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요.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 침투로 생기는 일시적인 안면근육 마비 증상이라고 하더군요. 이 고통을 겪고 나니까 비로소 (사인샨드의) 내 이웃들이 처한 아픔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면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맹추위가 여름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섭씨 40도를 넘나들었다. 매년 4월 한 달 동안은 모래 바람 때문에 바깥에 나갈 엄두도 못 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모래가 부엌, 거실에 수북이 쌓여 있곤 했다. 그래도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두 딸이 현지 아이들과 허물없이 잘 놀아서 좋았다”고 말했다.

9년 동안 몽골에서 지낸 양영자 씨는 현역으로 활동했던 198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도 조용조용히 했고, 몸도 군살 하나 없이 마른 체형 그대로였다. 그가 몽골에 있는 동안 가장 큰 보람을 느낀 일은 무엇일까.

“탁구를 가르치면서 가까워진 아이들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짐개라는 아이는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는데 가난해서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어요. 우리나라 후원자의 도움으로 울란바토르 외국어대학을 나와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갔는데, 수석을 한대요. 졸업 후 모교 교수가 되겠다는 그 아이가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그는 “짐개의 실질적인 후원자는 매달 100달러씩 송금하고 있는 한 변호사”라고 밝혔다. 안식년을 맞아 귀국했지만 이들 부부는 몽골에서만큼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몽골 어린이들을 위해 동화책을 몽골어로 번역 중이고, 그는 선교 활동 중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성경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두란노 바이블 컬리지에 다니고 있다. 또한 정신적으로 상처가 깊은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전문 상담 교육원 과정을 밟고 있기도 하다. 그는 몽골로 돌아가면 “탁구, 컴퓨터, 영어 등을 지도하는 청소년 문화센터를 개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가 현역 시절처럼 여전히 열정적이고 활기차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글 서철인 TOP CLASS 기자 | 사진 이창주
  • 2006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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