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가 있는 페이지| 술과 인생 - “술은 물이더라 물은 술이더라”

글 이상문 소설가
글쓴이 이상문님은 1983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단편 <탄흔>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후 《황색인》 《살아나는 팔》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립니다》 등의 장편소설을 냈다. 현재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전무로 있다.
동국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73년 8월, 절친했던 친구 이명주 시인(오른쪽)과 함께 백운산 계곡에서
두 해 전의 늦여름이었다. 인사동 골목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글 쓰는 대학 선배님들과 저녁 식사 겸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나 말고는 모두 나이가 예순을 넘겼고, 일흔 줄에 들어선 이도 두 분이 계셨다.

그 자리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자신의 취미가 무엇인가 하는 얘기로 흘러갔다. 글 쓰는 사람의 취미를 독서라 할 수도 없고, 가끔씩 등산을 한다 해도, 아주 가끔은 여행을 간다 해도 어찌 그것들을 취미라 할 수 있겠느냐는 말들이 나오더니, 결국은 여섯 중 다섯의 취미가 음주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사진 취미를 가진 한 분이 유별나게 여겨진 자리였다.

내가 처음 술맛을 본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의 뒤란에 드럼통을 잘라 만든 주조기를 설치하고 소주를 내리셨는데, 그걸 마실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할아버지께서는 장손인 내가 달라는 대로 술을 주셨고, 드디어 실실 웃으면서 해롱거리고 비틀거리는 단계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이때껏 그때의 달콤한 술맛을 잊지 못한다. 대부분 사람이 처음 소주를 입에 댔을 때 쓴맛이 나서 거북했다는 느낌이 공통적인 반응인데, 나는 왜 달콤했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나의 본격적인 음주는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그 시절의 광주(光州)는 산토끼, 꿩, 노루 같은 산짐승을 탕으로 만들어 파는 ‘산고기집’이 많았다.

자취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저녁에 밥 지어 먹기 싫으면 친구를 불러내 산고기집으로 갔다. 프라이팬에 산고기 몇 점과 시금치며 당면 따위를 넣고 양념 국물과 함께 되직하게 끓인 뒤에 밥을 넣어 비벼 먹는 식이었는데, 그것만 먹고 있으면 왠지 심심하고 허전했다. 그런데 막걸리를 홀짝거리면서 그것을 안주로 먹게 되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더욱 좋은 것은 그 자리서 친구와 나눈 소설 이야기였다.

그 무렵 나는 술이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하는 데 더할 수 없이 좋은 약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렇게 익힌 술이 나의 대학생활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술을 못 마시면 국문과생으로서 글을 쓸 수 없다는 분위기가 내가 다닌 대학교에 있었다. 평일에도 수업이 끝나면 술집으로 몰려가는 때가 있었지만, 특히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는 술집에서 밤을 샐 때까지 마셔 댔다. 실존주의가 어떻고 다다이즘이 어떻고, 누구의 소설이 어떻고 누구의 시가 어떻고 하면서 해도 해도 할 말이 남았지만, 이제 날이 샜으니 헤어질 때가 됐다는 식이었다.

한번은 동대문 부근에서 술을 마셨는데, 밤을 샐 만한 마땅한 방이 없는 술집이었다. 우리는 궁리 끝에 반말들이 주전자 두 개에 술을 사 가지고 동대문 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통행금지 시간을 신경 쓸 필요 없고, 맘껏 떠들어 대고 목청껏 노래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참으로 안전하고 아늑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렇게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 가운데 대학 졸업을 전후해서 이명주, 김장범, 최순열이 시인이 됐고 임성운이 소설가가 됐다. 나는 서른일곱 나이에 겨우 소설가란 이름을 얻은 처지가 됐지만….

내가 대학을 다닌 1960년대 후반에도 대학가는 자고 새면 시위였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한일회담, 3선 개헌 등이 걸려 있었고, 제대한 뒤에는 위수령으로 모자라서 계엄령이 내려지는 상황이었다. 내가 군 생활 3년을 마치고 복학해 보니 학생들이 많이 독해진 것 같았다. 학생들이 마시는 술이 막걸리에서 소주로 바뀐 것이다. 예전에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취하기 위해 마시던 술이 소주였는데, 놀랍고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막걸리를 마시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로 소주를 마시는 통에, 후배들 등에 업혀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소주를 막걸리처럼 마시는 습관을 아직 다 고치지 못한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한 것이 32년째인데, 무슨 술이든 곧잘 폭음을 한다.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이라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면, 복분자주에 소주를 섞거나 맥주에 소주를 섞어 마시는 술판을 벌인다. 가까운 친구들을 만났을 때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이유는 배도 부르고 술에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시는 술을 구태여 나는 ‘폭탄주’라고 하지 않는다. 더욱이 폭탄주를 만들 때 보여 주는 그 소란하면서도 화려한 풍광을 흉내 낼 줄도 모른다. 그저 사람들 만나 배부르게 취하면서, 속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라면 술자리로 넉넉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밤을 새울 수 있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가끔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술을 마시게 된다. 모두가 소설가가 되겠네 시인이 되겠네 하는 녀석들이다. 나는 녀석들을 생맥주집으로 데리고 가서, 일단 한 사람 앞에 1,000cc짜리 피처 하나씩을 안긴다. 당연히 나도 같은 조건으로 동참한다. 그렇게 마시면 누가 얼마나 마셨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어 자신의 주량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게 내가 술의 정직성을 가르치는 방법이다. 적게 마신 것을 감추고 큰소리 치지 말며, 많이 마신 것을 감추고 비틀거리지 말라는 뜻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다. 비바람만 심하게 몰아쳐도 그날 밤 잠자리에서 내내 뒤척이게 된다. 그래서 혼자 술을 마시는 때가 있다. 이때는 큰 유리잔에 얼음을 3분의 1쯤 채운 뒤 소주를 가득 부어 천천히 마시면 딱 좋다. 잔 속의 얼음이 다 녹았을 때쯤 눈꺼풀의 무게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소월이 그랬었다.

“술은 물이더라. 물은 술이더라.”

그렇다. 나는 물 마시듯 술을 마셨고, 술 마시듯 물을 마시면서 살아온 듯하다. 하여 물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볼 수 없듯이 술이 없는 세상도 상상해 볼 수 없다. 만약 술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그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으며, 그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
  • 200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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