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인물| 김명곤 국립극장장

뻘밭에 ‘꿈의 극장’ 건설한 실천적 문화지식인

이 글의 주인공 김명곤님은 1976년 서울사대 독어교육과 졸업 후 월간 <뿌리깊은 나무> 기자, 서울 배화여고 교사 등을 거쳐 연극 무대와 영화계에서 배우 겸 감독으로 폭넓게 활동해 왔다. 현재 국립극장 극장장으로 재직 중이다.
김명곤 국립극장장이 대통령과 국무총리에 이어 공무원 연봉 서열 3위라는 신문 보도가 나가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국립극장은 50년이 넘는 역사성을 지닌 국내 최대의 예술단체로 완강한 보수성과 관료주의적 전통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98년 책임 경영제라는 자율 경영 방식이 도입되고, 극작 연출가이자 배우인 김명곤이란 재야 운동권 출신 예술가가 첫 민간인 극장장으로 부임하면서 남산 국립극장은 술렁였었다.

특히 김명곤 형은 1996년 자신이 직접 쓰고 연출하고 출연까지 한 <격정만리>를 통해 친일 연극인의 모습을 무대에서 재현했고, 바로 그 극중 대상이 된 친일 연극인이 국립극장 초대 극장장이었다는 점에서 국립극장 공연예술가들은 김명곤 형의 극장장 부임을 당혹스러워했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새로운 문화 권력으로 변신한 김명곤 형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당파적 흑백논리가 고질적으로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김명곤 형의 기습적이고 과감한 국립극장장 입성은 애초부터 위험부담을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코 짧지 않은 6년이란 기간 동안 국립극장은 변질되거나 전통이 뒤집어지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고, 김명곤 형 또한 자신의 예술적 입장과 도덕성이 결코 변질되지 않았다.

● 김명곤 국립극장장(왼쪽)과 필자(오른쪽). 김명곤 씨가 극장장으로 취임한 이후 국립극장은 놀랍게 변했다.
그 사이 변화된 것이 있다면 남산 국립극장에 관객의 발길이 늘었다는 것, 국립극장 공연 레퍼토리가 상당히 새로워졌다는 것, 5년 연속 우수 경영기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문화 게릴라’라 불리던 나 같은 변방의 공연예술가도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등일 것이다. 알게 모르게 20년 가까이 그와 인연을 맺어 온 나로서는 그의 이런 성과 뒤에 감춰진 속내와 지나온 그의 삶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1952년 6?5 전쟁 통에 태어난 한 불우한 소년이 어떻게 자신의 꿈을 키우면서 세상과 몸 섞고 살아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오늘의 그의 성취는 돈이나 세속적 명예로 측정할 수 없다. 억대 연봉을 받는 국립극장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예술가의 꿈이 어떻게 세상과 만나 현실적 가능성으로 구체화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의 오늘의 모습은 가히 입지전적이다.

김명곤 형은 어쩌면 동 세대의 공연예술가들이 꺼려하는 세상의 뻘밭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 뻘밭에 꿈의 극장을 건설하려 한 설계사였다. 그 점에서 억대 연봉은 돈의 수치를 뛰어넘는 예술적 상상력과 실천적 의지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김명곤 국립극장장과 나는 1952년생 동갑내기다. 내가 김명곤 형을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부산 광복동 어느 카페 무대에서였다. 당시 나는 부산일보 편집부 기자로 재직 중이었고, 부산의 대학극 출신 젊은 여성 연극인 정경미 양이 초청 기획을 맡은 <장사의 꿈>에서 김명곤 형은 1인 다역의 배우로 출연하고 있었다. 나는 정경미 양의 요청으로 기사를 크게 다뤄 주었고, 객석에서 김명곤 형의 연기를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날 나는 그와 수인사도 나누지 않고 조용히 카페를 나왔다. 돌아오면서 심히 부끄러웠다. 그는 당시 다니던 직장도 관두고 저렇게 연극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있는데, 나는 지방 신문사 기자로 안주해 세월을 죽이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참담한 자괴심에 빠졌던 것이다. 결국 나는 2년 후 신문사를 그만두고 다시 연극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김명곤 형과의 두 번째 인연은 1989년 4월 내가 연희단 거리패의 <시민 K> 공연팀을 이끌고 서울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두 번째 상경 공연을 할 즈음이다. 그때 부산에서 서울에 온 연희단 거리패 단원들이 서울 연극을 보고 싶다고 해서 마침 연우 소극장에서 공연 중이던 극단 아리랑의 <불감증>을 단체관람했다. 지방에서 온 극단이라고 아리랑 단원들이 쾌히 무료입장을 허락해 주었다.

김명곤 작·연출의 <불감증> 또한 내부적 에너지와 지성이 응축된 소극장 연극이었다. 이때도 나는 김명곤 형을 만나지 못했다.

국립극장 내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격의 없는 친구처럼 포즈를 취한 두 사람.
세 번째 인연은 그다음 해 1990년 6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서였다. 연극평론가 이상일 선생이 김명곤 작·연출 <점아 점아 콩점아>와 이윤택 작·연출 <오구>를 젊은 연극인들의 경박한 전통 해체라고 비판하면서 김명곤 형과 나는 일제히 반격을 시작했고, 그 연극 논쟁은 <한국연극>으로 이어져 1990년대 벽두에 최대의 연극 논쟁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나는 김명곤 형을 만나지 않았다. 서로 만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논쟁에 참여했던 셈이다.

네 번째 인연은 1996년 극단 아리랑과 연희단 거리패 10주년 합동 기념공연 <어머니>에서였다. 내가 대본을 쓰고 김명곤 형이 연출을 맡고 아리랑과 연회단 거리패 배우들이 같이 공연하는 형식이었다. 제작은 동숭아트센터에서 맡아 주었다. 이때 김명곤 형과 첫 대면을 하고, 우리의 공동작업이 좌우합작의 선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의기투합했다. 그 당시 <어머니> 포스터는 지금까지 김명곤 극장장실에도 밀양 연극촌 내 숙소에도 걸려 있다.

그리고 2003년 12월, 김명곤 국립극장장의 전화 연락을 받았다. 국립극장에 예술감독 책임제가 시행되는데 그 첫 예술감독을 맡아 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공익근무하는 느낌으로 선선히 응했다. 유쾌한 인연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일을 먼저 저지르는 꽤나 골치 아픈 예술감독이었고, 김명곤 형은 쓴소리 없이 뒷감당을 해 주는 넉넉한 대형의 면모로 나를 감싸 주었다.

1970년대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연극은 연극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치열한 길트기를 전개한다. 김지하 임진택 김광림 김석만 김명곤 김민기 이상우 채희완 황지우 등 연우무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연극과 현실의 길트기는 연극 운동인 동시에 일종의 지식인 운동이었다. 그들은 연극을 단순한 ‘쟁이의 예술’에서 지식인의 ‘실천적 운동’으로 고양시켰다. 여기서 김명곤 형과 임진택 형은 우리의 전통에 천착하면서 민족주의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 실천적 결과물로 드러나는 김명곤 형의 활동 영역은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극작 연출가이자 극단 아리랑의 대표로, 그리고 영화배우 겸 시나리오 작가로, 민족극 운동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살아왔던 김명곤 형의 궤적은 전형적인 문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 준다. 그런 그가 왜 스스로 관료주의의 아성이었던 국립극장장직을 선택했을까?
그는 과감하게 자신을 기존 제도권 문화 한가운데로 진입시키면서 재야 지식인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고, 자신이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입장이 됨으로써 문화 지식인의 역할을 완성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이런 삶의 선택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지식인의 한 분명한 선택으로 두드러진다.

국립극장 내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격의 없는 친구처럼 포즈를 취한 두 사람.
고려 무신정권 시대, 이제현은 죽림에 은둔하여 《역옹패설》을 집필했고, 천재 시인 임춘은 거리에서 헤맬 때, 이규보는 결코 높지 않는 벼슬(아마 지금의 국립극장장 직급 정도였을 것이다)을 살면서 스스로 <동명왕편>을 완성하고 팔만대장경 경전 작업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이규보가 제도권 지식인으로 존재하면서 후학들에게 끼친 영향과 공로는 죽림에 은둔한 이제현보다, 술에 젖어 거리를 헤맨 광기의 시인 임춘보다 훨씬 크고 넓다.

이러한 문화 지식인의 선택과 역할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사림파 지식인들의 입장으로 이어진다. 세상에 나아가되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되,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은 행하지 않는다는 선비 정신이 그들의 삶의 태도였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런 실천적 문화 지식인들이 세상을 버티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급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이창동 형이 문화관광부 장관직을 수행했고, 전후세대 최고의 시인 황지우 형이 팔자에도 없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총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진흙을 흙탕물 쳐 그 물결을 드높이 날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역할인지 겪어 보지 않고는 모른다. ■
이 글의 주인공 김명곤님은 1976년 서울사대 독어교육과 졸업 후 월간 <뿌리깊은 나무> 기자, 서울 배화여고 교사 등을 거쳐 연극 무대와 영화계에서 배우 겸 감독으로 폭넓게 활동해 왔다. 현재 국립극장 극장장으로 재직 중이다.
  • 200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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