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의 품격

영화 〈넘버3〉의 ‘재떨이’ 배우 박상면

“사이코패스 같은 제대로 된 악역을 하고 싶다”

사진제공 : 박상면
재떨이(영화 〈넘버3〉의 배역), 불곰(〈달마야 놀자〉), 망치(〈주유소 습격사건2〉), 대가리(〈상사부일체〉), 하마(MBC 드라마 〈왕초〉)와 같은 그로테스크한 이름으로 분(扮)했던 박상면(朴相勉·52). 맛깔스러운 감초 연기로 극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던 배우다.

서울예대 연극과 87학번인 그의 별명은 한때 ‘박천만’. 2001년 개봉한 〈달마야 놀자〉, 〈조폭 마누라〉에서 각각 500만 관객을 동원, 합이 1000만 관객을 채웠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오성·장동건의 영화 〈친구〉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잊힌 별명이지만 당시로선 희귀한 일이었다. 억세게 운이 좋은 배우다.

세련되고 귀족적인 도회 이미지가 아니다. 덩치에서 유추할 수 있는 우직하고 어리숙한 면이 더 많다. 무시무시할 것 같은 조폭 영화에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역할로 출연했다. 정확히 말하면 조폭 코미디 영화. 혹은 한국형 갱스터 코미디 영화라고 할까. 화를 내고 누군가를 위협해도 그 모습이 무섭거나 무겁지 않았다.

시트콤 〈세 친구〉(2000)에서 엉뚱 순진남 이미지, 영화 〈리베라 메〉(2000)에서 책임감 있는 소방관, KBS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2004)에서 지고지순한 멜로 연기, KBS 드라마 〈서울 1945〉(2006)의 악역 박창주도 기억에 남는다.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2009) 같은 예능에서 발군의 입담을 과시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쉽다. 관객에게 한쪽 면만 줄곧 보여준 것 같은, 그의 안에 날것이 있을 것 같다.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머리가 짧아 보였다. 콧수염을 기르고 남색 아디다스 단체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상당히 나이 들어 뵈는 연기를 했지만 그의 나이 겨우 쉰 초반이라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 올해로 데뷔 25년 차네요.

“25년은 무슨…. 뭐가 대단하다고. 이덕화 씨는 올해 데뷔 50년이래요.”

— 데뷔 25년 차쯤 되면 내 모습이 어떨 거라고 데뷔 초에 상상한 적 있나요.

“없어요. 흘러가는 대로 왔는데 그래도 잘 버틴 게 다행인 것 같아요. 없어진(잊힌) 사람, 많거든요.”

박상면은 유영진 감독의 영화 〈보스〉(1996년 작)로 데뷔했다. 박근형·김수미·독고영재·박준규 같은 중견 배우들이 이 영화의 간판이었다. 2500 대 1의 오디션을 뚫고 단역으로 충무로와 연을 맺었다.

“지금 보면 어찌나 촌스러운지…. 1995년에 촬영하고 이듬해 상영됐어요. 1996년 〈넘버3〉를 찍고 이듬해 상영됐고요. 사실 〈넘버3〉가 제 데뷔작이라 볼 수 있죠. 연극무대에서 무명배우로 10년 보냈는데, 당시만 해도 연극배우들이 (영화계 문을) 두드리지 않았어요.… 겁이 나서. 그런데 제가 뚫었죠. 저랑 안석환 선배랑. 그 뒤로 (연극) 후배들이 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었어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아무리 공부 잘해도 반장 자리를 도맡아 할 순 없잖아요. 전 그랬어요. 초등학교서부터 대학까지 학급 오락반장, 학교 응원단장 자리를 빼앗겨 본 적이 없어요. 물어보세요. (김)건모(서울예대 동기)한테. 대학 문을 딱 나서면 무조건 성공할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어요. 처음 배우로 입문할 때는 1년간 연극 포스터를 붙였죠. 포스터를 벽에 붙일 때마다 걸려서 딱지 끊으러 파출소에 가곤 했어요. 꼭 저만 걸리더라고요.”

— 왜 그랬을까요.

“모르죠. 그래서 저는 운전만 했어요. 1989년 군에서 제대하고 연극무대에 섰는데 하도 (배역을) 안 맡겨서 그만두고 회사에 들어갔죠. 2년 만에 그만두고 집에서 숯불을 피우고 그랬죠.”

그의 부모는 40년째 가업으로 숯불갈비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 시절, 다시 대학로를 찾아가 배우의 길을 다시 걸었다. 박상면은 “무명 시절, 탤런트와 개그맨 공채 시험에서 무진장 떨어졌다”고 했다. SBS에서만 4번이나 탈락했단다.

“비주얼이 안 좋으니까 탤런트 시험엔 서류전형조차 안 됐어요. 그런데 개그맨 시험은 항상 결선까지 갔어요. 개그맨이 됐다면 오히려 더 잘됐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린 시절 배삼룡, 이기동, 남철, 남성남의 연기를 동경했거든요. 하지만 꼭 개그맨이나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생각보다 일단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이가 되고 싶었어요.”


‘재떨이’로 이름 알려 … 〈달마야 놀자〉, 〈조폭 마누라〉 각각 500만 관객 동원

박상면은 1997년 작 〈넘버3〉에서 ‘재떨이’ 역을 맡아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가 ‘재떨이’로 이름을 알린 〈넘버3〉 이후 한국 영화계는 조폭 코미디 바람이 몹시 불었다.

〈조폭 마누라〉(2001)와 〈두사부일체〉(2001), 〈가문의 영광〉(2002)이 시리즈로 제작돼 스크린을 달궜다. 여기다 남자들끼리의 거친 우정을 그린 〈친구〉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개봉되는 영화 대부분이 조폭물이었다.

〈조폭 마누라〉가 조폭의 남녀 벽을 허물었다면 〈두사부일체〉는 조폭의 학력 파괴를 불러왔다. 〈달마야 놀자〉는 조폭이 절에 들어갔다는 설정이 기발하고, 〈가문의 영광〉은 조폭 가문의 우스꽝스러운 아우성이 흥미를 끌었다. 회칼이 등장하고 피가 튀기는 김래원의 〈해바라기〉(2006)나 원빈의 〈아저씨〉(2010) 같은 2000년대 후반의 조폭류와는 전혀 달랐다.

조폭 코미디 덕분에 조폭에 ‘가담한’ 조연들도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송강호, 박광정, 정운택 그리고 박상면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스릴러물이 대세지만 당시엔 조폭 코미디물 시대였어요. 많은 배우가 조폭 영화로 발돋움했죠. 〈넘버3〉만 해도 그때 출연한 배우들 요즘 다시 뭉치면 제작비가 어마어마할걸요? 최민식, 한석규, 방은희, 이미연…. 한 명만 빠졌네요. 박광정 선배. 참 나, …술도 안 먹던 사람이….

그때 제 나이 30대 초반이었어요. 2001년 출연한 〈달마야 놀자〉, 〈조폭 마누라〉가 모두 500만 이상 관객이 와서 1000만 관객을 돌파했어요. 당시엔 대단했어요. 그때 거만하게 다녔죠. 하하하. 한 해 영화 두 편으로 1000만을 ‘태우는’ 이가 없었거든요.”

박상면은 “IMF 이후라 너무 살기 힘드니까 재미난 조폭 코미디를 보았다. 우울하고 심각한 영화는 외면했던 시대”로 기억했다.

— 요즘 조폭 영화는 어떻던가요.

작년 추석 때 개봉해 680만 관객을 끌어들인 〈범죄도시〉(2017)도 조선족 조폭 얘기다. 요즘 액션 영화는 조직(조폭)을 소재로 하면서도 더 야비해지고 더 대담해지는 추세다. 2000년대 초 어리벙벙한 조폭들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범죄도시〉를 봤느냐”는 질문에 그는 뜻밖에 이렇게 말했다.

“보다가 말았어요. 저랑 코드가 안 맞아서요. 요즘 조폭 영화는 너무 잔인하고, 리얼해지고 있어요. 이제 웃음을 찾을 때가 됐는데…. 영화도 돌거든요. 코미디 영화 때가 다시 오면 제 세상이 오겠죠. 하하하.”

— 코믹하고 순진한 극중 이미지가 너무 굳어버린 게 아닌가요.

“제가 원래 그래요. 순진하지는 않지만 제 내면에 순수함이 있죠. 연기 변신이란 게 그래요. 연기란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해 내면 이미지 변신이 자연스레 되는데 제가 변신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그려질 수 있거든요. ‘저 사람, 왜 저러지? 하던 대로 하지…’ 하고요. 그렇게 비칠 수 있어서 무리하게 이미지 변신을 하기보다 맡은 배역, 대본에 충실하면 저절로 이미지가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으니 탈피하겠죠, 자연스럽게. 나이 먹은 조폭, 얼마나 추해 보이겠어요? ‘오야붕’이라면 모를까….”

박상면은 “조폭물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악역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잔인한 악역은 안 해 봤어요. 조그마한 악역은 해 봤지만. 사이코패스 같은 역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정말 순진하게 있다가 뒤돌아서 사람을 죽이고…. 제가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선한 이미지니까 오히려 뒤통수를 칠 수 있으니….”


코믹 연기는 매우 힘든 연기

시트콤 〈세 친구〉에 출연했던 윤다훈, 정웅인, 박상면.(왼쪽부터)
영화평론가들은 코믹 연기가 매우 힘든 연기에 속한다고 말한다. 나름 치밀한 계산과 전체적 극의 맥락을 장악하고 있어야 웃음보를 터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저는 본능으로 합니다. 연습은 하죠. 대사가 입에 착 달라붙게 달달 외우죠. 거기서부터 본능대로 합니다. 그런데 계산된 연기를 하면 재미가 없어요. 코미디는 1초 차이거든요. 아니 0.5초 차이예요. 상대 배우의 액션이 있고 0.5초 안에, 동시에, 0.5초 후에 리액션하는 것에 웃음 강도 차이가 어마어마해요.”

— 리액션을 0.5초 안에 하나요, 아니면 0.5초 후에 하나요? 어느 쪽인가요.

“그건 상황에 따라 달라요. 코미디는 감각이거든요. 연습만으론 안 돼요. 어렸을 때부터 오락반장을 하며 교탁 앞에서 직접 리허설을 하며 제 안에 자리 잡은 노하우죠.”

— 연극무대도 도움이 됐겠네요.

“50석도 안 되는 소극장에서 제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객석이 함께 들숨 날숨 쉬던 경험이 있잖아요. 거기서 자신감이 붙으면 드라마 연기나 영화 연기를 해도 밀리지 않죠.”

그러나 연극배우 출신이 모두 영화나 드라마에서 성공하란 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영화배우가 드라마나 연극에서 잘하리란 법도 없다.

“연극 연기만 하다가 갑자기 드라마 연기를 하면 부대껴요. 적응이 안 돼요. 대사가 매번 바뀌니까요. 연극은 똑같은 대사만 외는데, 드라마는 매번 대사가 다르고 감정이 다르잖아요. 움직임도 연극 무대에선 자유롭지만 카메라 안에서 해야 하니까 어색하죠. 경험의 차이예요. 드라마에서도 콘티를 생각하고 움직이면 되거든요. 하지만 못 움직이니까 스스로 어색해져요.”

박상면은 조심스레 이런 말도 했다.

“일단 편하지 않으면 연기가 어색해요. 요새는 디지털이라 필름을 안 쓰지만 제가 데뷔할 때만 해도 ‘액션!’ 소리에 필름이 ‘드르르륵…’ 하고 돌아갔어요. 그래서 그땐 리허설을 많이 했어요. 필름 아끼려고. (손으로 가슴을 대며) 여기서 쿵쿵 뛰는 긴장감이란….”

그런 긴장감을 이겨내고 코믹 연기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상면은 큰 덩치답게 “컨디션이 좋을 때는 기분 좋게 소주 다섯 병을 비운다”고 했다. 그가 꼽은 주당(酒黨)은 개그맨 강호동, 김구라, 지상렬, 정준하다. 거기에 박상면을 더하면 5대 주당이 된다. 최고의 술꾼은 누굴까?

“다 한 번씩 취한 모습을 봤는데 그중에서도 지상렬이 좀 먹어요. 오히려 강호동은 술을 덜 먹죠. 못 먹더라고요.”

— 5대 주당이 회합을 가진 적은 없죠?

“네. 없어요.”

— ‘박상면이 지구전에서 제일 강하다’고 하던데요.

“에이~ 지구전이 어디 있어. 많이 먹으면 가는 거지. 요새는 소주 2병 정도 먹으면 딱 좋아요.”

— 배우의 매력은?

“남들이 살지 않은 삶을 배우는 다 살아봅니다. 의사도 해보고 조폭도, 국회의원도 해보고…. 간접경험을 하거든요. 저는 다큐나 뉴스를 많이 봐요. 그게 연기에 도움이 돼요. 다큐에선 가식적인 눈물이 없어요.”

박상면은 “남의 연기를 잘 받쳐주는 배우가 좋은 배우”라고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 성공하려면 자기가 연기를 잘해서 (극이) 성공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연기를 제가 받아먹어서 (상대가) 더 잘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해요. ‘똥배우’들은 상대 배우의 연기에 리액션을 하지 않고 자기 연기만 해요.”

— 리액션엔 애드리브가 포함되나요.

“상대 배우가 액션을 하는데 약속되지 않은 대사를 툭 치고 나가면 상대가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대사의 리액션이 아니라 감정의 리액션이 중요한데, 감정으로 대사를 받아주면 상대는 더 신이 나서 연기할 수 있게 돼요. 그럼 제가 대사할 때 같이 묻어 올라가면서 서로 툭 치고 올라가고, 툭 치고 올라가서 땅! 하고 때려버리니까.”

그는 “주연도, 조연도 해봤지만 어떤 위치에 서든 다 가치가 있다. 작품에 꼭 필요한 연기자가 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 (배우들이) 무명을 견디는 힘은 어디서 오나요.

“사람이 살다보면, 정말 때가 옵니다. 그 분야에 있으면 꼭 와요. 그건 진리예요. 전 그 말을 믿어요. 대신 이 바닥에 있어야 해요. 힘들다고 무대(스크린) 밖으로 나가면 그 사람에게 기회가 안 와요. 바닥부터 시작해 버티면 정말 와요. 그것은 제가 책임질 수 있어요. 인생에 기회가 3번 온대요. 저는 두 번째에 잡은 것 같아요.”

— 두 번째 기회는 영화 〈넘버3〉인가요.

“두 번째는 오디션 본 것이죠. 2500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영화 〈보스〉죠.”

— 세 번째 기회가 한 번 더 올까요.

“저는 믿어요. 〈주유소 습격사건2〉 (2010)를 연출한 김상진 감독도 그런 말을 해요. ‘기다리면 온다’고. 대신 이 바닥에서 배고파도 버텨야 해요. 힘들다고 딴 것 하면 절대 기회가 안 와요. 버텨야 해요.”
  • 2018년 05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