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종 캬라반ES 대표

국내 최초로 UN 시장을 뚫은 사나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세계지도가 낯선 이를 먼저 맞이한다. LA・뉴욕・런던 등 일렬로 늘어서 세계 각지의 시간을 알려 주는 시계들이 이곳이 24시간 깨어 있음을 알려 준다. 삼성동 무역센터 41층에 자리 잡은 야외 설비 및 조립식 구조물 제작 업체 캬라반ES. 사장을 포함해 직원이라고는 27명이 전부인 이 작은 기업이 국내 최초로 UN(국제연합)에 물품을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2004년 UN 물품 조달 공개경쟁 시장에 뛰어든 후 4전 4승, 승률 100%. 전례 없는 일이라 UN의 담당 직원들은 “혹 입찰 전 우리 마음을 커닝하는 것 아니냐”며 농담할 정도다.

“UN은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에 정말 매력적인 곳입니다. UN만큼 한국 중소기업들의 기술력과 열정을 인정해 주는 곳은 없어요. 우리 회사가 그걸 입증합니다.”

기자를 만난 권혁종 대표의 첫 일성(一聲)이었다. 2003년 설립된 이 기업이 세간의 이목을 끈 건 올 1월 초 UN평화유지군의 야외 숙소 조달 공개경쟁에서 미국・캐나다・유럽 등지의 글로벌 기업 틈바구니를 뚫고 1억 달러 계약을 따내면서다.

무역회사를 거쳐 산업용 소비재와 직물 분야에서 3M과 함께 세계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미국의 IPG그룹에서 기술고문을 하던 권 대표는 IPG그룹이 국제기구 입찰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고, 한국의 기술력이면 이 시장을 개척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캬라반ES를 설립했다. 그리고 따낸 UN과의 첫 계약.

“2004년 UN평화유지군에 야전 숙소를 납품했습니다.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다른 상품에 비해 독특해야 한다는 전략이 맞아 들어간 거지요. 외국의 다른 기업들은 보통의 대형 텐트를 제안했는데 저는 차갑고 울퉁불퉁한 땅바닥에 텐트를 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생각했죠.”

그러다 우리나라의 원두막을 떠올렸고, 공중에 뜬 텐트를 제안했다. 보온성과 쾌적성을 높인 이 안은 1위를 차지해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그 후 권대표는 UN 직원들이 동료로 착각할 만큼 UN 텐트 납품 담당자를 자주 찾으며 신뢰를 쌓아 갔다. 그 효과는 얼마 안 돼 나타났다. 2004년과 2005년 각각 야외용 샤워시설과 화장실, 야전용 전기설비 경쟁 입찰에 참여해 줄 것을 UN이 공식 요청해 왔다. UN이 특정 기업에 입찰참여를 공식 요청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한다. 두 경쟁 입찰은 모두 캬라반ES가 따내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정작 권 대표의 승부욕을 자극한 것은 두 입찰이 진행되던 2006년, UN으로부터 참여를 제안받은 1억 달러 규모의 UN평화유지군 조립식 구조물 공개경쟁이었다. 권 대표는 “규모도 규모이지만 지금껏 경쟁했던 상대들과는 무게감이 다른 거대 기업과의 경쟁이라 정말 이기고 싶었다”고 한다.

“국제기구 조달시장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조립식 구조물 시장을 휩쓸며 조립식 축구장은 물론 비행기 격납고와 심지어 조선소까지 만들어 내는 다국적 기업 RUBB도 참여했습니다. 노르웨이와 영국, 미국 자본이 합쳐진 곳이지요. 꼭 이기고 싶다는 승부욕이 일더군요.”

캬라반ES가 제작한 야외 조립식 구조물.
2006년 UN 물류기지가 있는 이탈리아의 브린디지(Brindisi). 영업 인력뿐 아니라 기술 임원진까지 출동해 프레젠테이션하는 RUBB의 진용을 보곤 주눅이 들기도 했다는 권 대표. 하지만 프레젠테이션 후 오히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프레젠테이션 내용과 UN 담당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는 우리와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지 우리보다 몇 백 배 크고, 오래된 회사라는 것뿐이지요.”

첫 입찰 공고 때만 해도 시속 160km의 바람을 견디면 되던 구조물의 조건이 곧 시속 240km로 변경되는 등 점점 더 까다로워지면서 경쟁자들이 두 손을 들거나 난감해했다. 하지만 그는 경쟁자들에 앞서 UN에서 요구한 조건들을 충족시켰다. 나아가 조립식 구조물 사이에 30~60cm의 공간을 만들어 보온과 방음력을 획기적으로 높인 설계를 선보이며 UN 담당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결국 6개월에 걸친 실사를 거쳐 일본과 유럽 기업들에 비해 높은 가격을 썼음에도 캬라반ES가 1억 달러의 주인공이 됐다.

설립 7년,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한 듯한 캬라반ES와 권혁종 대표. 하지만 그는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어왔단다. 단 한 번도 실패를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그에게 사업이 쉬웠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제가 사채도 써 봤습니다”란 답이 돌아왔다.

“UN과 체결한 계약서를 들고 은행에 가면 ‘이게 뭐냐’거나 ‘전례가 없는 일이라 어렵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사채도 쓰고, 외상으로 자재를 들여와 첫 번째, 두 번째 납품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정을 안 UN이 ‘필요하면 우리가 한국 정부와 금융권에 말해 주겠다’고 얘기했을 정도예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는지 묻자 “성과가 있으니 이제는 정부와 외교 당국자가 이런 비즈니스를 인지하고 있고, 수출보험공사나 신용보증기금 같은 정책 금융사들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묻자 “꼼꼼함과 빨리빨리 정신, 그리고 솔직함”이라고 말한다.


한국 특유의 신속함과 꼼꼼함이 경쟁력

“저는 상대방이 벅차할 만큼 자료를 충분히 준비합니다. 그들이 보기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요. 조립식 구조물 입찰 때는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자료들을 디자인을 가미한 책자로 만들어 제출했고, 경쟁사가 6개월에 걸쳐 준비한 자료들을 밤을 새 가며 한 달 만에 UN 담당자 책상 위에 놓아두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반응이 ‘원더풀(Wonderful)’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UN 등 국제기구와의 거래를 통한 중소기업의 생존 이야기로 이어졌다.

“국제기구는 특정 지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자체 생산 시설 없이 소비만 하는 조직이죠. 세계 전체가 시장이란 의미예요. 중소기업들이 무역을 하며 가장 고민하는 가격에서도 상당한 메리트가 있습니다. 무조건 가격이 낮은 제품만 찾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공급하는 사람이 정당한 가격을 받아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고, 이것이 곧 경쟁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조직입니다.”

캬라반ES가 보유한 국내·외 특허 관련 증명서. 캬라반ES는 30여 개의 국내 특허와 세계 50여 개국에 걸쳐 10여 개의 국제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말끝에 “갑(甲)의 위치에 있지만 을(乙)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조직”이라고 국제기구를 정의했다. 그러고는 UN과 같은 국제기구의 특성만 이해해도 한국 기업들의 기술력이면 충분히 승산있는 시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제기구는 파트너를 선정할 때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정직하고, 정확하게 일하느냐를 심사합니다. 꼭 세계 1등이 아니어도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조건들이죠. 당장 우리만 해도 세계 1등기업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성의를 보였습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솔직히 ‘모른다’고 했고, 힘든 것이 있으면 ‘힘들다’고 말했더니 그들이 믿어 주더군요. 솔직함만큼 훌륭한 마케팅은 없다고 봅니다.”

인터뷰 말미, 그는 국제기구와 사업으로 연을 맺었지만 국제기구 이상으로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착한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사진 : 문지민
  • 200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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