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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농업회사법인 ‘참본’ 이강범 전무

한국 최고의 술을 만드는 남자

그가 꿈꾸는 최고의 술은 뭘까?
“원재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향과 맛을
그대로 살린 것”이라고 말한다.
소주에 재료를 담가 우려 내는
침전주와 달리
재료를 효모로 발효시키는
발효주가 여기에 더
가깝다고 한다.
2007년 ‘한국 최고의 술’로 등극한 술이 있다. 2007년 9월 국세청이 대한민국 최고의 전통주를 뽑기 위해 개최한 첫 주류 품평회에서 약주 부문 금상을 차지한 데 이어 10월, 농림부가 주관한 제1회 한국 전통주 품평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황진이주’. 전북 남원의 작은 농업회사법인인 ‘참본’이 만든 이 술이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와 대형 주류회사들이 만든 내로라하는 술들을 제치고 최고상을 거머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 전통주 품평회에는 60명의 심사위원들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최고 술을 가려냈다. 황진이주는 포도주 감별사인 소믈리에들이 뽑은 인기상도 받았다. ‘누가 이 술을 만들었을까?’하는 궁금증을 안고 남원으로 향했다.

‘참본’에서 술 제조를 책임지고 있는 이강범 전무. “당신이 최고의 술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앞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가다듬었을 뿐인데…”라고 뒤로 뺀다. 참본이 출범한 것은 1994년. 남원에서 막걸리 양조장을 하던 양선기 씨가 지리산 부근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약술을 복원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고, 오랫동안 주류 회사에서 경험을 쌓은 김영수 씨를 영입하면서 본격적인 약술 연구가 시작됐다.

지리산에서 자생하는 약초 10가지를 섞어 전통 발효방법으로 만든 술인 ‘강쇠’나 어린 솔잎과 쌀을 60일 동안 발효시킨 ‘사계’, 오미자를 주원료로 한 ‘풍경’, 100% 복분자 발효주로 특허를 받은 ‘참복분자’가 이렇게 만든 술.

3년 전 김영수 씨가 갑자기 사망한 후 뒤를 이어 술을 만들고 있는 이강범 전무는 ‘우리 전통 술을 어떻게 하면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리노베이션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고 한다. 제조 과정을 모두 데이터화해 표준화하고, 동ㆍ서양인 모두가 좋아하는 맛을 찾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나온 술이 2006년 선보인 ‘황진이’와 ‘주몽’이다. 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을 빌렸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나는 재료들로 대대로 약술을 만들어 먹던 사람들, 이를 발굴해 상품으로 만든 故 김영수 씨, 이 술의 맛을 가다듬어 현대화한 이강범 전무의 노력이 어우러져 ‘최고의 술’이 탄생한 것이다.

전북 남원시 노암동, 지리산 기슭에 자리 잡은 ‘참본’의 술 공장을 찾아 금방 만든 황진이주를 한 모금 입에 넣었다. 오미자와 산수유에서 우러나온 투명하게 붉은색이 먼저 눈을 사로잡고, 상큼한 과일 향이 코끝을 스친다. 단맛ㆍ신맛ㆍ쓴맛ㆍ짠맛ㆍ매운맛 등 오미(五味)가 모두 들어 있다는 오미자와 신맛이 강하고 약간의 단맛과 떫은맛도 나는 산수유가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낸다. 알코올 도수도 13도로 높지 않은 편. 오미자와 산수유 모두 한약재로 쓰이는 재료라 약술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독하지 않은데다 향이 좋아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술 품평가 허시명 씨는 이 술에 대해 “술을 한 모금 머금고 혀를 굴려 보니 신맛이 목젖을 향해 곧게 뻗어 나가는데, 단맛도 북을 치듯 ‘덩’하며 입천장을 울린다. 이 순간 발효된 곡물과 누룩 맛이 바지런하게 혀 밑에 깔린다. 단맛이 강한 듯한데 신맛이 끝까지 뒤따라오고, 곡물 맛이 고소하게 출렁거린다. 맛이 강한 편인데도 조화를 잘 이룬다”고 평했다.

‘참본’ 이강범 전무의 방은 연구실이나 실험실 같은 분위기였다. 각종 열매가 여기저기에서 발효되고 있고, 발효된 술이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황진이주에 대해 그는 “최고의 맛을 찾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항상 ‘이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까?’ 고심한다는 것. ‘궁극의 맛’을 찾기 위해 그는 재료들을 이리도 섞어 보고 저리도 섞어 보는 실험을 되풀이한다. 미묘한 맛의 차이를 감별하려면 타고난 미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담배는 일찌감치 끊었고, 맵고 짠 음식은 미각을 마비시키니 잘 먹지 않는다. 맛을 잘 구분하려면 무엇보다 몸 컨디션이 좋아야 하기에 일찍 자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등 몸 관리에 주의한다”고 말한다. 물론 타고난 미각도 중요하다. ‘참본’의 한 직원은 “미식가인 전무님 덕에 숨어있는 맛 집을 찾아갈 때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황진이주가 전적으로 그의 미각에 의존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술이 만들어지기까지 2년 동안 수없이 맛 테스트를 거쳤다. 만나는 사람마다 몇 가지 샘플 술을 내밀며 “어떤 것이 좋으냐?”고 물었다. 그 결과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술을 찾아냈고, 주류 품평회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것이다. 수백 종에 이르는 민속주가 각 시도에서 예비심사를 거친 후 본심에 올라 치열한 경쟁 끝에 거둔 결과다.


다국적 음료회사에서 수십 년 쌓은 노하우 접목

이강범 전무는 원래 술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30년 가까이 다국적 음료회사에서 품질관리 책임자로 일했고, 정년퇴직 후 ‘참본’으로 옮겼다. 양석호 ‘참본’ 부사장은 “대중적인 입맛을 잡기 위해 음료회사에 계셨던 분을 스카우트했다”고 한다. 이강범 전무는 “술 만드는 공정이 음료와 비슷해 그동안 쌓아 온 노하우를 접목시키기 쉬웠다”고 한다. 그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한 곳이 발효관련 회사. 2~3년 그곳에서 일한 경험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남원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다닌 그는 부산, 서울, 광주로 돌며 공부하고 일하다 남원의 전통주를 최고의 술로 만들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음료회사에 있을 때 제가 출근하지 않으면 공장이 돌아가지 않았어요. 어떤 재료를 어떤 비율로 섞을지 정확한 데이터로 음료를 만들지만, 시간마다 시음하며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기계를 세웠죠. 1분에 1000병씩 쏟아져 나오는 곳이라 순간적으로 재빨리 판단하는 게 중요하죠.”

맛과 향의 조그만 변화라도 놓치지 않아야 하는 일. 수십 년간 이렇게 훈련한 게 전통주를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업그레이드하는 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가 참본에 와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이 앞서 만들어 오던 술 제조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이전에 눈대중이나 손대중으로 만들던 것을 모두 데이터화하여 항상 똑같은 맛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든 것. 어떤 누룩과 효모를 쓸지, 어떤 온도에서 얼마 동안 발효하고, 숙성시킬지 수없이 실험하고 맛을 보면서 최상의 조건을 찾았다. 그는 “어떤 효모를 쓰느냐에 따라 발효된 술의 맛과 향이 달라진다”고 한다. 좋은 균을 찾아내고 배양하기 위해 남원에 있는 서남대에 연구 의뢰도 한다. 음료든 술이든 주재료가 되는 게 물. 그가 있던 음료회사에서는 전 세계에서 똑같은 맛의 음료를 생산하기 위해 물을 특수 처리했다. ‘참본’의 경우 지리산 자락의 지하수를 사용하는데 “물맛이 좋다”고 자랑한다.

그가 꿈꾸는 최고의 술은 뭘까? “원재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향과 맛을 그대로 살린 것”이라고 말한다. 소주에 재료를 담가 우려내는 침전주와 달리 재료를 효모로 발효시키는 발효주가 여기에 더 가깝다고 한다. 그는 요즘 오디를 이용한 술을 연구 중이다. 새콤달콤한 맛과 향의 오디는 안토시아닌 등 건강성분이 풍부해 약술로 그만이라는 것. 최상의 오디주를 얻기 위해 어떤 발효과정을 거칠지, 다른 재료를 얼마나 섞을지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그가 연구실 한쪽에 놓인 통을 열자 발효 중인 오디의 상큼한 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사진 : 장성용
  • 200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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