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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과학자 유룡 카이스트 교수

시골 자연 속에서 나노 기술의 꿈이 싹텄지요

숲에 사는 황조롱이는 알을 몇 개나 낳을까? 호박꽃에 앉은 꽃등에는 벌과 비슷한데 왜 쏘지 않는 걸까? TV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 자연은 호기심 왕성한 소년의 놀이터이자 스승이었다. 낮에는 등잔불 밑에서 책을 보고, 밤에는 농사짓는 부모를 도와 들일을 마다 않던 시골 소년.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농사일에서 면제될 정도였지만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고, 혼자 힘으로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 대학교수가 됐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유룡 교수. KAIST 내 ‘나노 다공성 물질 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그가 2007년 국가과학자로 선정되었다. 국가과학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낸 과학자를 매년 선정해 16억 원 내외의 연구비를 6년 동안 지원하는 국내 최대 연구 지원 사업. 유 교수는 2006년 제1호로 선정된 이서구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신희섭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박사에 이어 세 번째 국가과학자가 되었다.

그는 수 나노미터(10억 분의 1m) 크기의 구멍이 규칙적으로 나 있는 탄소 틀을 만들어 그 안에 원하는 원자나 분자들을 조립해 새로운 나노 단위 구조물을 만드는 방법을 세계 최초로 창안했다. 이와 관련한 연구 결과들은 세계 최고의 과학학술지인 <네이처>와 자매지 <네이처 머터리얼스>에 잇따라 주요 논문으로 게재됐다.

1986년 조교수로 부임, 21년 동안 나노 물질 연구에 매진해 온 유 교수를 대전의 KAIST에서 만났다. 자연과학동에 있는 그의 연구실 책상에는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온갖 연구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유 교수는 “이메일로도 하루 10여 건 이상 자료가 온다”고 말했다. 그중에는 그의 논문을 인용해 작성한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 논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16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총 8000회 이상 인용되었다고 한다. 노벨화학상 수상자들의 논문 인용 횟수가 평균 5000회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다. 그의 연구 업적이 이토록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 교수는 자신이 개발한 나노 다공성 물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육안으로 보기 힘든 나노 물질에는 직경이 -10의 9승인 구멍이 수없이 나 있습니다. 이 구멍 속에 원자나 분자를 가두면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딪히며 화학작용을 일으키지요. 이 원리를 이용해 구멍이 규칙적으로 나 있는 탄소물질을 만들면 붙이기 어려운 원자와 분자를 좀 더 빠르고 쉽게 붙일 수 있습니다. 탄소물질이 화학 반응의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수소와 산소를 반응하게 해 화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게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가 개발한 탄소물질은 연료전지의 전극촉매를 대체할 수 있는 원천기술로 고효율의 연료전지나 미래형 센서의 재료, 흡착제, 전극물질 등 차세대 에너지 핵심 소재 개발에 활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의 촉매공정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석유보다 매장량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메탄가스도 고급 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나노 다공성 물질은 에너지 분야뿐만 아니라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등 환경 분야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연과학동에 있는 ‘나노 다공성 물질 연구단’ 실험실은 보통 강의실 하나 크기에 각종 실험 도구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거기에는 21년 전 이 땅에 나노 기술 기지를 만들고자 했던 젊은 과학자의 꿈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유룡 교수는 서울대 공업화학과와 KIST를 거쳐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귀국한 그는 막 개교한 KAIST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만 해도 KAIST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실험 기자재는 물론 함께 연구할 대학원생이 없어서 모든 걸 혼자 해야 했지요. 그 무렵에는 새벽 1시 이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 9시 곧바로 강의를 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런 저를 말없이 내조하며 두 아이를 훌륭하게 키운 아내에게 가장 미안하고 고마워요. 제 성공의 50%는 아내 몫입니다.”

부인은 고려대를 졸업한 생물학 박사. 한때는 대학 강단에 섰지만 지금은 유 교수와 두 자녀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첫째인 아들은 대전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KAIST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후 현재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고, 딸은 KAIST 생물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서울대 입학이 내 인생의 전기

그는 “요즘 같은 입시제도라면 저도 제대로 대학가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법대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부모님 뜻에 따라 고등학교 때 문과 반에서 공부한 그는 혼자서 따로 공부해 자신이 원하는 학과에 입학했다. 예비고사만 통과하면 주요 과목만 시험 보는 본고사에 응시할 수 있는 제도 덕분이었다. 서울대에 합격한 것에 대해 그는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중요한 전기였다고 표현한다.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선배들 중 서울대에 진학한 사람이 단 한 명이었습니다. 그것도 재수를 거쳐서요. 서울대 입학을 목표로 정한 후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죠.”

우선 서점에 가서 서울대 본고사 기출 문제집을 모두 구해 문제 유형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나갔다. 그리고 예상문제를 만들어 풀어 보았다. 그 결과 과외나 학원의 도움 없이도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는 것.

“생각해 보면 사물에 대한 분석력은 어린 시절 자연을 관찰하는 습관에서 시작해 고교 시절 본격화된 것 같아요.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자연 속에서 자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 박사가 개발한 나노 다공성 물질에 관한 논문이 게재된 학술지.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주변의 똑똑한 친구들에게 자극을 받아 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고, 성적 우수자만 들어가는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고 한다.

“우수 집단에 들어가니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더군요. 그 덕에 석사 과정인 KIST 화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할 수 있었죠.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제가 기거했던 기숙사 방이 맨 꼭대기 층 끝이어서 겨울이면 굉장히 추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희섭 박사와 황영기 전 우리은행장도 그 방에서 생활한 선배들이었어요.”

그는 한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일단 그 분야의 뛰어난 집단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그 분위기에 동화돼 좀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그는 “우수 집단에 들어간 덕분에 더 빨리 나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KAIST는 이제 21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구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연구 과제를 수행하느라 밤늦게야 퇴근하곤 한다. 그런 그에게 연구 과제로 인한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자연을 좋아합니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지만 나무와 꽃을 많이 가꿉니다. 또 시간이 날 때마다 화훼 전문지들을 탐독하기도 합니다. KAIST에서 나무와 꽃과 새에 관해 저보다 많이 아는 사람은 드물 걸요? 자연은 여전히 저의 놀이터이자 휴식처입니다.”

사진 : 이규열
  • 200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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