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광학시트 디지털기 만드는 김상근 상보 대표

시행착오 끝에 세계 최고 됐어요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이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을 자주 왕래했지요.
한번은 출장길에 아키하바리 전자상가에 갔더니 우리가 정성 들여 만든 테이프가
벌크로 싼값에 팔리고 있더군요.
일본 제품은 몇 배 이상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어 화가 났습니다.”
TV, 모니터, 카메라, PDA, 네비게이터 등 각종 디지털 제품들이 갈수록 얇아지고 있다.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아 휴대하고 다닐 수 있는 TV나 컴퓨터까지 개발돼 머지않아 상용화될 것이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디지털 기기들이 이렇듯 가볍고 얇아질 수 있는 데는 디스플레이 주요 소재 중 하나인 광학필름의 눈부신 진화 덕분이다.

30년 동안 인쇄코팅기술 외길을 걸어온 (주)상보는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고 있다. LCD용 광학시트 제조업체 중 확산시트겫맬=쳤츃프리즘시트를 동시에 공급할 수 있는 회사는 전 세계를 통틀어 상보가 유일하다. LCD용 광학시트는 자체 발광 능력이 없는 패널 뒤에 장착돼 빛을 내고 색상을 더욱 선명하게 하는 광학필름. 기능별로 각각 빛을 확산시키고, 보호하고, 모아 주는 세 겹의 필름으로 돼 있는데, 전 세계 프리즘 시장의 60%를 점유하고 있는 3M사도 확산시트나 보호시트 제조 기술은 없다고 한다.

경기도 김포에 있는 (주)상보 1, 2공장과 연구소 전경. 이 회사는 오는 10월 코스닥에 상장할 계획이다.
연매출 573억 원(2006년) 규모의 중소 업체가 IT 산업의 꽃으로 불리는 디스플레이 분야를 선도하는 비결이 뭘까. 설립 이후 지금껏 도전정신 하나로 버텼다는 김상근 대표를 서울 양평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다부진 체격 때문일까. 어딘지 모르게 그는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과 닮은 모습이었다.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긴 하지만 혈연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목소리에 패기와 열정이 가득하다. 그가 상보를 설립한 것은 스물일곱 살 청년이었던 1977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던 집의 방 한 칸을 전세 내고 받은 40만 원이 창업자금이었다고 한다.

“서울 중부시장에서 아는 분의 공장 한 귀퉁이에 인쇄기계 하나를 놓고 의류용 포장지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는 식품회사 포장지도 하청 받아 제조했는데, 여러 가지로 운대가 안 맞아 1년여 만에 문을 닫았지요. 그러다 다시 시작한 사업이 오디오와 비디오테이프의 리더 부분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1979년 새한미디어가 국내 최초로 오디오와 비디오테이프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그는 당시 일본에서 전량 수입해 쓰고 있던 리더테이프에 눈을 돌렸다. 오디오나 비디오테이프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앞부분과 뒷부분에 부착하는 테이프.

“포장지나 테이프 모두 원료는 다 같은 필름입니다. 일본이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 없다 싶어서 1년 동안 죽자 사자 매달려 리더테이프 개발에 성공했죠. 덕분에 리더테이프뿐만 아니라 오디오 비디오 포장지까지 새한미디어에 납품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상보는 SKC와 LG 등의 대기업에도 제품을 공급하게 되었고, 1986년부터는 해외시장에도 진출하면서 리더테이프 분야에 관한 한 아시아 최고 수준의 회사로 성장했다. 이때부터 이 분야를 리드하고 있던 일본 업체들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이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을 자주 왕래했지요. 한번은 출장길에 아키하바리 전자상가에 갔더니 우리가 정성 들여 만든 테이프가 벌크로 싼값에 팔리고 있더군요. 일본 제품은 몇 배 이상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어 화가 났습니다. 바로 일본 제품을 사서 비교해 보니 제가 봐도 일본 것이 좋더군요. 같은 원료를 쓰는데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 걸까, 면밀히 비교 분석한 결과 인쇄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당시 한국은 필름을 일일이 사람 손으로 오리고 붙이는 제판작업으로 인쇄를 했는데 일본은 컴퓨터와 접목시킨 자동제판기술로 훨씬 더 정교하고 빠르게 인쇄를 하고 있었다. 김 대표는 인쇄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던 이스라엘 쪽에 연락해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자동제판 설비를 들여왔다. 그리고 1990년 인천 남동공단에 그라테크라는 별도의 인쇄판 금형 전문 법인을 설립했다.

“그라테크를 설립하기까지 총 30억 원 가까운 돈을 투자했습니다. 업계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난리였죠. 한국에서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운 지인들도 이러다간 상보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며 만류했습니다만, 국내 인쇄 기반 전체를 바꾸지 않는 한 계속 일본에 뒤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였죠.”

자신이 쓰러지더라도 일단 국내에 유입된 설비니만큼 누군가가 인수해서 사용하면 그것이 곧 한국 인쇄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의 예견대로 자동제판 기술은 변화가 느린 한국 인쇄업계에 쉽사리 침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라테크는 외환위기 때 남의 손에 넘겨야 했지만, 첨단 인쇄술의 도움을 받은 상보는 해외시장에서 일본의 독주를 막아 낼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상보의 제품이 미디어필름 분야 최강자로 세계 시장의 70%를 점유하게 된 것.

“속도가 더디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국내 인쇄업계가 컴퓨터 시스템화하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고백하자면 시도했다가 폐기처분한 아이템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등사기 원리를 컴퓨터에 적용한 디지털 프린터기도 그중 하나입니다.”


일본 이기려 인쇄회사 세워

1994년 그라테크는 당시 일본이 독점하고 있던 디지털 프린터를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개발했다. 1년 동안 원료인 실리콘을 수백 트럭 버려 가며 필름을 개발했고, 60억 원을 들여 롤 마스터 생산 설비까지 들여왔다. 그런데 일본 제품과 달리 롤 마스터가 필름을 제대로 감아 주지 못했다. 일본은 세 겹의 필름을 합한 후 또 한 번 필름 코팅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원인을 알았을 때는 일본 실리콘 업체들이 자국 기술 보호를 위해 원료의 한국 수출을 전면 중단해 버렸다.

“도저히 길이 안 보여 그만 접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직원들 보기도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하더군요.”

DVD며 MP3가 등장한 1990년대 들어 미디어필름 분야 매출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자 상보도 위기였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할 판국이었다. 바로 그때 운명처럼 김 대표의 눈에 들어온 것이 LCD였다.

“코팅기술이 축적되어 있으니 LCD 쪽으로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1년도 말이었는데 LCD 시장 규모가 1조 원을 넘었습니다. 1000억 원 시장에서 고생했는데, 1조 원의 시장이 눈앞에 보이는 거예요.”

돈을 쏟아 부으며 시행착오를 거듭해 온 것이 새로운 성공의 바탕이 됐다. 1980년대부터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 개발 인력을 확보하며 연구 개발을 거듭해 왔기에 곧장 광학필름 개발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 2005년부터는 광학필름의 주요 재료인 아크릴을 대체할 신소재 연구에 착수해 친환경 소재인 실리콘에 여러 가지 물질을 합성한 소재를 개발했다.

상보는 디스플레이 분야뿐만 아니라 윈도필름 코팅기술 분야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윈도필름은 자외선은 물론 열적외선까지 차단해 에너지 절감에 유리하기 때문에 고층건물 유리에 많이 사용된다.

“우리 생활 곳곳에 필름 코팅기술이 적용되는 곳이 많아요. 자동차와 방탄용 유리에도 사용되고, 사진 출력용 인화지에도 사용되니까요.”

김 대표는 상보가 개발한 인화지를 보여주었다. 보통 인화지에 인쇄한 것보다 훨씬 선명하고 섬세했다. 가격대가 높아 아직은 전문 사진작가들만 이용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일반인들도 찾게 될 것이라고 한다. 전체 매출의 60%를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올리고 있는 상보의 올해 예상 매출은 900억 원. 이 회사에 있어서 디스플레이 분야는 물을 마시기 위해 끝없이 한 우물을 파다 발견한 유전이다. 김 대표는 “미디어필름 분야와 마찬가지로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마지막 주자가 되는 것이 우리 회사의 목표”라고 말했다.

사진 : 이창주
  • 2007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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