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병선 영도벨벳 회장

47년간 한 우물 판 세계 최고 벨벳회사

경북 구미시 시미동에 위치한 (주)영도벨벳 제1 공장. 지은 지 30년은 족히 돼 보이는 벽돌 건물 2층에 올라서자 딴 세상이 펼쳐졌다. 드넓은 현관 벽과 천장에 화려한 벽화가 장식돼 있고, 프런트에는 카키색 벨벳 정장을 입은 직원이 안내를 맡아 호텔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낡고 허름한 공장 내부를 5성급 호텔처럼 변신시킨 주인공은 벨벳이었다. 한쪽 벽면을 장식한 화려한 장미꽃 액자는 물론 천장을 수놓은 성화도 벨벳 원단에 사진을 디지털 프린트한 작품.

화려한 재킷을 입고 나타난 류병선 회장 역시 벨벳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듯했다. 다소 날카롭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이 벨벳 소재의 재킷 덕분에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다. 47년 동안 한 우물을 판 것에 대한 자부심인 듯 류 회장이 내민 명함에도 벨벳 조각이 붙어 있었다.

“벨벳으로 만들 수 있는 제품은 무궁무진합니다. 여기에 있는 소파와 커튼은 물론 벽지까지도 벨벳으로 제작할 수 있죠. 일반 천으로 하는 것보다 벨벳으로 해놓으니까 훨씬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나요?”

그는 “명화나 사진 작품을 벨벳 원단에 프린트해 놓으니 얼마나 우아하고 격조 있느냐”며 “디지털 프린트는 날염과 달리 염색 과정에서 오물이 생기지 않아 친환경적”이라고 말한다.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지만 활기가 넘쳤다. 그는 젊은 직원들이 깜짝깜짝 놀랄 만큼 감각적이고 아이디어가 많기로 유명하다.

류 회장이 점심식사를 하자며 안내한 구내식당도 벨벳 천지였다. 조각보처럼 전통미가 돋보이는 의자 덮개며 식탁보는 모두 자투리 원단을 활용해 그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점심 식사는 꼭 구내식당에서 한다는데,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며 직원들의 안부를 챙겼다. “김 과장님, 아이 돌이 얼마 안 남았죠?” “이 대리는 결혼 날짜 잡았어요?” 직원들 하나하나의 신상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저희 직원들은 모두 한 식구처럼 지내요. 지난 연말에는 이곳 식당에서 망년회를 했는데, 누구 아이디어인지 각자 새해 각오 한마디씩을 적어 왔더군요.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나올 뻔했습니다.”

구내식당 한편에는 지난 연말 직원들이 천에 쓴 구호가 아직도 걸려 있었다. ‘우리가 미치지 않으면 고객이 미친다’ ‘국내 1등을 넘어 세계 1등이 되다’ 등의 구호에서 세계 최고의 벨벳을 만든다는 직원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영도벨벳은 현재 세계 벨벳 시장에서 점유율 25%(2005년 기준)를 차지하며 1위를 달리고 있다. 외환위기 때만 해도 워크아웃 대상이었던 이 기업의 최근 성장세는 눈부시다. 2001년 수출 1000만 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2005년에는 2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지난해에는 2600여만 달러를 달성했다.

품질도 계속 향상돼 세계의 명품 시장에서 각광 받는 벨벳을 만들고 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이탈리아), 앤 클라인·탈보트(미국), 자라(스페인), 이토추 패션(일본) 등 세계 최고의 패션 브랜드들이 이 회사 벨벳을 사용하고 있다. 류 회장은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각오로 매달린 결과”라고 말한다.

“저는 지금도 ‘안 된다’는 말을 가장 싫어해요. 남편에게도 ‘가진 것 없는 집에서 태어났지만 당신은 최고 기업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곤 했죠. 그런 자신감이 평생 벨벳 개발에 매달리게 한 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1960년 방한화용 털실 짜며 사업 시작

영도벨벳의 역사는 1960년 그가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과 함께 대구시 범우동에서 직조기계 4대를 빌려 방한화용 털실을 만들며 시작됐다.

“밀수품에 끼어들어 온 일제 벨벳의 인기가 높았어요. 이것을 우리가 만들어 팔자는 생각에 수입 벨벳을 들고 연구소를 찾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남편은 벨벳 직조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가마솥에 불을 때며 염색 탱크를 개발하고, 마당에 산더미 같은 고철을 쌓아놓고 직조기를 만들어 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결국 개발해 낸 벨벳은 서울 서문시장(현 동대문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런데 도매업체들이 어음으로 결제하는 바람에 항상 자금이 달렸다. 그는 “원단 자투리를 보따리에 들고 다니며 한복감으로 팔아 부족한 자금을 댔다”고 회고한다.

“그때부터 재무 담당은 늘 제 몫이었어요. 크고 작은 법률 문제도 제가 해결해야 했지요. 남편은 연구, 개발에만 몰두했습니다.”

1972년부터는 아세테이트 벨벳을 생산해 미국 시장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일본 하세가와사와 기술제휴, 독자 브랜드인 ‘쓰리 이글(Three Eagle)’을 중동 시장에 내놓아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런데 영도벨벳이 세계 벨벳 시장에서 명성을 쌓아가자 원사를 공급하던 일본 업체들이 갑자기 물량을 줄였다. 견제 대상이 된 것. 남편은 “더 이상 일본 업체에 끌려 다닐 수 없다”며 국산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사용한 벨벳 제품을 개발했고, 면 벨벳, 실크 벨벳도 만들어 냈다.

“남편의 꿈은 세계 최고의 벨벳 생산 기지를 한국에 만드는 것이었어요. 1995년에는 실을 뽑고 직물을 짜서 가공하는 일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생산 설비까지 들여놓았습니다.”

5년 거치 3년 상환으로 리스한 설비 자금은 외환위기 때 금리가 오르면서 엄청난 부담감으로 압박해 왔다. 당장 해결해야 할 부채가 400억 원이 넘어 회사가 부도 위기에 몰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건강에도 빨간불이 켜져 1980년대 후반부터 일에서 손을 뗐던 그가 회사로 돌아왔다. 그는 남편에게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아는 게 없으니 겁도 없었지요. 남편을 대신해 대표 자리에 오르자마자 구조조정을 시작했습니다. 공장 규모도 줄이고, 가지고 있던 부동산이며 아파트까지 처분해 빚을 줄여 나갔지요.”

그 와중에도 수출 실적은 상승세를 탔다. 세계 최대의 설비와 최고의 기술력으로 생산한 마이크로 벨벳, 나노 벨벳, 텐셀 벨벳 등이 점차 시장을 넓혀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2003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직원들을 모두 내 식구라 생각했던 분이라 제사도 회사에서 모십니다. 올해 신년회 때 직원들이 저에게 큰절을 하데요.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일해준 그들에게 제가 큰절을 해야 할 판인데…. 이제 제 소원은 하나예요. 우리 직원들이 세계 최고의 회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존경받는 기업을 만드는 것입니다.”

영도벨벳은 지난 2000년 벨벳에 그림이나 사진을 인쇄한 벨벳 벽지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지난해에는 LG전자와 손잡고 LCD 모니터 제조 과정에 사용되는 벨벳을 생산하기 위해 연구 개발 및 설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제까지 이 특수 벨벳 시장은 일본 아게하라사가 독점해 왔다고 한다.

“섬유도 이제는 첨단산업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도태됩니다.품질로 세계 명품 시장을 공략하면서 첨단 소재 개발에도 게을리 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회사 운영을 맡고 있는 장남 이충열 사장은 어머니 류 회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분이세요. 세계 패션 트렌드를 저보다 빨리 읽고 판단하기도 하시죠. 제가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사진 : 이창주
  • 2007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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