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이름 내건 메뉴 선보인 프랑스 요리의 대가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 ‘시즌즈’ 총주방장 박효남 상무

글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사진 이창주
“오늘은 어떤 요리가 좋을까요?”

“농어가 싱싱합니다.”

잠시 뒤, 손님에게 메인 메뉴를 추천한 요리사는 한가족이 앉아 있는 홀로 조리 기구를 끌고 나온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싱싱한 농어를 직접 요리한다. 손님의 취향에 맞춰 소금 간을 하고, 은근히 달궈진 소스를 뿌린다. ‘박효남식’ 프랑스 요리다.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의 프랑스 식당 ‘시즌즈’가 지난 3월 연 ‘셰프 팍스 클래식스’(chef park’s classics). 총주방장 박효남 상무(45세)가 특별히 고른 ‘대표 음식’들로 식탁을 차린 행사로, ‘요리사 박효남’ 브랜드의 출범이었다. 주문한 음식을 손님 테이블 앞에서 직접 요리해 보이는 서비스도 했다. 주방 안에서 이루어지던 박효남의 ‘요리 예술’이 홀로 나와 손님들 앞에서 공개된 것이다.

박효남 상무는 국내 특급 호텔 프랑스 식당에서 내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총주방장에 올랐다. 그는 주방 보조에서 시작해 최고의 요리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3월 말 시즌즈에서 만난 박 상무는 160㎝ 정도 작은 키에 이웃 집 아저씨같이 소박하고 편안한 인상이었다.

“반갑습니다. 휴~ 오늘 일정도 빡빡하네요. 요즘은 특별 행사 때문에 새벽에 직접 노량진 시장으로 재료를 구하러 다니느라, 이맘때면 피로가 몰려오네요.”

호텔 측 설명에 따르면 그의 이름을 걸었던 ‘셰프 팍스 클래식스’ 행사는 대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단골 고객들이 앞 다퉈 식당을 찾으면서 매출이 20%가량 늘었다는 것. 박 상무는 이 때문에 하루 저녁 여섯 테이블을 돌면서 요리를 하기도 했다.

“저는 생선 요리 하는 것을 좋아해요. 간을 소금으로 할지, 간장으로 할지, 구울지 튀길지 등 조리법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한 가지 재료로 한 달 내내 다른 요리를 할 수 있거든요. 제가 좋아하다 보니 고객들에게도 생선 요리를 많이 권합니다.”

피곤하다더니 요리 이야기가 나오자 어느새 그의 눈이 빛난다. 그가 최고의 프랑스 요리사가 된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이었다.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생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이 연탄배달을 하며 근근이 먹고살 수 있는 형편이었는데, 2남 2녀 중 장남이었던 그는 일찍이 ‘확실한 기술을 익혀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돈 벌 궁리를 하던 그에게 요리학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걷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학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어요. 몇몇 남학생들은 두리번거리다가, 도망치듯이 학원으로 쏙 뛰어 들어가더라고요. 요리학원이었어요. 그 광경이 참 이상해서 기억에 남았었죠. 얼마 뒤에 사촌형이 ‘요리를 배워 보지 않겠느냐’며 제안했는데, 선뜻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파, 감자 깎는 주방 보조로 요리사 생활 시작

중학교를 마친 1978년, 그는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의 수도요리학원에 등록하고, 3개월 실습과정을 거쳐 시험을 치르고 중식 조리사 자격을 땄다. 학원 원장의 도움으로 하얏트호텔 주방에 취직한 그는 처음 호텔 안의 여러 음식점에 소스와 수프를 공급하는 파트에서 일했다. 호텔 주방에서 일한다고 하지만, 말처럼 근사한 일이 아니었다. 조리보조인 ‘헬퍼’로 하루 종일 감자와 양파를 깎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그는 그러나 이 일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밤늦도록 쉬지 않고 칼을 놀렸다. 남들이 양파 3~4개를 깔 때, 그는 10개씩 깠다. 그런 그에게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1983년 힐튼호텔이 오픈할 때였어요. 같이 일했던 외국인 주방장이 자기를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어요. 뜻밖의 제안을 듣고 무작정 가겠다고 답했어요.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딱 2개였거든요. 새로운 일을 해 보고 싶다는 것과 외국인을 따라가면 영어 하나라도 더 배우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웃음)”

프랑스 요리와 그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힐튼호텔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된 박 상무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요리사의 직책은 조리 보조인 헬퍼, 서드 쿡, 세컨드 쿡, 퍼스트 쿡, 부주방장격인 어시스턴트 셰프, 주방장격인 셰프, 총주방장격인 이그제큐티브 셰프의 순이다. 각각의 단계에 따라 역할이 다르다. 헬퍼는 말 그대로 조리사 보조이고, 서드 쿡은 접시에 올려지는 야채, 세컨드 쿡은 수프, 퍼스트 쿡은 소스를 담당한다. 어시스턴트 셰프급이 돼야 비로소 손님에게 제공되는 요리에 손을 댈 수 있다. 헬퍼에서 퍼스트 쿡이 되는 데 평균 10년, 주방장은 20년이 걸린다. 그런데 박 상무는 5년 만에 헬퍼에서 퍼스트 쿡으로 올라갔다. 만 38세였던 1999년에는 국내 호텔업계의 최연소 조리이사가 됐고, 2001년 총주방장, 지난해 2월에는 상무로 승진했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프랑스 요리의 아기자기한 맛에 빠져 산 지 벌써 23년이 됐네요. 그런데도 빈 접시를 대할 때는 항상 초보 기분이 듭니다. 사실 프랑스 요리는 잘한다는 기준이 따로 없거든요. 기본에 충실하면서 손님의 취향을 세심하게 기억해 그에 맞게 요리하는 것, 그것이 제 경쟁력이겠네요.”

재료에 충실한 프랑스 요리의 특징을 살려 그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에 맞는 요리들로 새로 메뉴를 짠다. 흔히 접할 수 있는 동양 음식의 재료에 프랑스 요리법을 접목해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기도 한다. 토종 요리사인 그의 ‘창의적인 요리법’에 매료된 미식가 단골이 많다고 한다.

박 상무와 인터뷰 약속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핸드폰 하나 들고 다니지 않는 아날로그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손님에게 요리가 담긴 접시를 서브하는데, 호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려 낭패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 길로 핸드폰을 내던져 버렸다. 그가 얼마나 ‘고객 중심’에 철저한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예다. 프랑스 요리사인 박 상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김치찌개다.

“프랑스 요리를 하지만, 촌스러운 제 입맛이 달라지지는 않더라고요. 여전히 고추장, 된장, 김치가 제일 좋아요. 베이컨 김치찌개 모르시죠?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메뉴인데, 정말 맛이 끝내 줘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의 이름을 내건 ‘박효남식 베이컨 김치찌개’를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2006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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