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라면왕 이철호

노르웨이에서 “미스터 리 주세요”는 “라면 주세요”와 동의어로 쓰인다. 그만큼 ‘Mr. Lee’ 라면은 노르웨이에서 라면의 대명사가 돼있다. 세계의 라면 시장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지만 노르웨이에서만큼은 예외다. ‘Mr. Lee’가 노르웨이 라면 시장의 78%를 점유하고 있다. 한 봉지에 1,300원 정도인 이 라면은 노르웨이에서 작년 한 해 2,500만 봉지가 팔렸다. 450만 노르웨이인이 1년에 6봉지 씩 끓여 먹은 셈이다.

미스터 리 라면을 만든 주인공은 한국인 이철호 씨(70세)다. 이 라면의 겉봉에는 이 씨의 웃는 얼굴이 꽉 차 있고, 한 켠에는 한글로 ‘닭고기 맛’, ‘쇠고기 맛’, ‘매운맛’이라고 쓰여 있다. 노르웨이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라면을 모국에서 출시하기 위해 방한한 그를 만났다. 70세라는 나이가 도통 믿기지 않는 이 씨는 라면 출시 당시부터 얘기를 꺼냈다.

“라면 봉지에 한글을 넣지 않으면 안 팔겠다고 했어요. 노르웨이인들에게 한국에도 독자적인 문자가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고, 한국 사람이 만든 거라는 걸 주지시키고 싶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그의 인기는 연예인을 능가한다. 북부 나르비크의 한 백화점 라면 시식 행사에 참가한 그를 보기 위해 초등학교 한 반의 절반이 결석한 사건이 기사화된 적도 있다. 그는 노르웨이 최고의 요리사로도 이름이 높다. 유럽 요리사협회 선정 ‘최고 요리사’가 되어 이민자 최초로 노르웨이 국민훈장을 수상하는가 하면 ‘위대한 노르웨이인’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철호 씨의 70년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전쟁, 만리타향에서의 굶주림과 소외감, 첫 눈에 반해 결혼한 독일인 부인과의 사별, 그리고 온갖 역경을 헤치고 노르웨이 라면왕으로 우뚝 서기까지.

그는 오른쪽 다리를 절룩거린다. 중학생 때 맞은 6?5가 남긴 상처다. 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진 이 씨는 미군을 따라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속초에 있을 때 그는 심한 폭격으로 온몸에 파편이 박혀 죽음 문턱까지 갔다. 의학적 사망 판단을 받고 시체실에서 하루를 보낸 것. 가까스로 눈을 떠 보니 온몸의 살이 썩어 구더기가 꾸물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즈음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노르웨이 의사인 파우스 박사를 만났다.

파우스 박사는 한국의 어린 학생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고, 어떻게든 살려 내려 노력했다. 1954년 4월, 이철호 씨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의학 선진국이었던 노르웨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노르웨이로 이민 간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그곳에서 40여 차례 수술을 거치면서 목발 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하지만 피붙이 하나 없는 어린 이방인이 노르웨이에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텔 벨 보이를 시작으로 서류 심부름, 동물병원 잡역부, 화장실 청소부를 전전하며 끼니를 때웠다. 그는 “신체적 장애가 주는 불편함보다 더 힘들었던 건 배고픔”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식이 빵죽이었어요. 빵 가게에서 ‘새한테 준다’며 빵 부스러기나 유통기간이 지난 빵을 얻어 와 모두 잠든 밤에 몰래 부엌에 들어가 찬물에 불려 먹었죠. 지금도 저는 빵죽을 좋아합니다. 라면도 푹 퍼진 라면이 좋아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니까.”

배고픔에 대한 서러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최고의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밤낮으로 일했다.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그는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다른 사람이 그릇을 스무 개쯤 닦으면 저는 오십 개를 닦으면서 남보다 더 깨끗하고 반짝반짝하게 닦으려 애썼어요. 마무리할 때에도 접시 하나 스푼 한 개도 반듯하게 놓으려 했고요. 그러다 보니 윗분들이 좋게 보신 것 같습니다.”

그를 눈여겨본 호텔 주방장이 그를 요리 전문학교에 보내 주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한 이 씨는 이 학교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요리의 선진국인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 세계적인 요리사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됐다.

그가 노르웨이에서 라면 사업을 시작한 건 1989년. 인삼차 사업에 실패해 고배를 마신 후였다. 유럽인의 식탁에 라면을 내놓는다는 건 당시로선 무모한 도전이었다. 처음엔 한국 라면을 가져다 파는 일부터 시작했다. 역시 노르웨이인의 반응은 냉담했다. 꼬불거리는 라면발을 보고는 “벌레 같다”며 맛조차 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멀리 내다보고 그들과의 인간관계부터 터 나갔다. 결국 그의 정성에 감복한 노르웨이인들이 라면을 맛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이제 됐다’ 싶은 그는 갈고 닦은 요리 실력을 발휘,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프를 개발했다. 이렇게 해서 ‘Mr. Lee’ 라면이 탄생했다. 라면의 생산은 한국 농심사, 판매는 노르웨이의 식품회사 ‘토로’(TORO)에서 했다. 그는 로열티로 매출액의 5%를 받는다.

이철호 씨가 노르웨이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건 라면왕으로 성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업가로서 그는 철학자 같은 구석이 있다. 무슨 질문을 하면 늘 한 박자 쉬고 대답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질문에 답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라. 그리고 그 대답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한 말을 평생 가슴에 품고 실천해 왔기 때문이란다. 그에게 노르웨이인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사회봉사를 우선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즐겁게 일하다 보면 돈은 저절로 벌게 됩니다. 번 돈은 사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노르웨이에서 번 돈을 다시 노르웨이에 돌려주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미스터 리 라면을 한국에서 출시해 돈을 벌면 한국에 환원할 겁니다. 동업자에게도 ‘한국에서 번 돈은 한국을 위해 다 쓸 거다. 동의하면 함께 일하자’고 했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다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인생 아닙니까.”

이 씨의 한국 사랑은 남다르다. 독일인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둔 세 딸이 모두 결혼해 손주가 셋이 생겼는데 사위와 손주의 성이 모두 이 씨다. 사윗감들에게 “성을 바꾸지 않으면 결혼 승낙을 하지 않겠다”며 엄포를 놨다 한다. 그렇다면 그는 태어난 나라 한국과 은인의 나라 노르웨이 중 어디를 조국으로 생각할까. 그에게 “당신의 조국은 어디입니까?”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한국에 있을 땐 노르웨이인이고, 노르웨이에 있을 땐 한국인입니다. 만약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난다면 저는 자살할 겁니다.” ■
라면왕 미스터 리의 경영 철학

1. 모든 비즈니스의 출발은 인간관계다
사업은 남녀의 연애와 같다. 인간관계에서는 어느 일방만 만족해서는 그 관계가 잘 유지되지 못한다. 상호 만족해야 한다.

2.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찾아가라. ‘나를 때리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 푸대접받는 방문을 되풀이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3. 정직이 최고의 상품이다
신뢰란 유리 같은 것이다. 한번 금이 가면 다시 붙일 수는 있지만 원래 상태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 2006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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