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면’ 누른 매운맛 틈새라면 김복현 사장

처음 시작한 자리가 ‘틈새’이기도 하지만, 그의 장사 전략도 따지고 보면 ‘틈새 전략’이다. 위를 고문하는 것 같은 매운맛의 라면을 비싼 가격에 팔았다. “라면을 싸구려 음식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오기가 생겼다”고 한다.
국내 최대 라면 전문점 ‘틈새라면’이 GS 25와 손잡고 2월 초 편의점용 컵라면과 봉지라면을 내놓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GS 25의 2,000여 개 매장에서이긴 하지만, 160여 종이 전쟁을 벌이는 라면시장에서 20년간 1위를 고수한 ‘신라면’을 누르고 더 많이 팔린 것이다.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보다 더 지독하게 매운 틈새라면. 마니아들에게 ‘틈새라면’은 라면이기 전에 문화다. 1981년 명동의 건물과 건물 사이 폭 45㎝ 정도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문을 연 라면집. 그래서 이름이 ‘틈새’였던 이 라면집은 처음부터 문화를 팔았다. 긴 탁자와 의자 11개, 종업원이 다닐 공간이 없어 끓여 낸 라면을 손님끼리 전달 전달해서 받아먹던 이곳은 동아리방 같은 분위기로 인근 직장인과 여고생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벽에는 손님들이 붙여 놓은 메모로 꽉 차 있고, 단무지는 파인애플, 물은 오리방석, 휴지는 입 걸레라는 은어로 부르는 곳. 이곳에서 매운 입을 호호 달래 가며 라면을 먹고 메모로 사랑을 고백하는 커플도 많았다고 한다.

19세 때 시작한 3평짜리 분식집을 국내 최대 라면 전문점으로 키운 김복현 사장(44세)을 서울 을지로 ‘틈새라면’ 본사에서 만났다. 그가 ‘틈새라면’을 시작한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방랑생활을 할 때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당장 먹고 입고 자는 게 문제였다. 하루 종일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추운 겨울날, 언 땅을 파고 들어가 비닐을 뒤집어쓰고 잤다. 어릴 때부터 공을 차며 축구선수가 되고자 했던 꿈도 접어야 했다. 앞날이 막막했지만 친구는 많았다. ‘잘 입은 거지가 잘 얻어먹는다’는 생각에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다녔더니 친구들은 그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사흘 내내 굶었는데, 술만 사 주는 거예요. 지금 같으면 ‘배고프다. 밥 좀 사 줘’라고 했을 거예요. 당당하려면 솔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거든요.”

이때 결혼한 누나가 나섰다. “네 앞가림은 해야 할 것 아니냐. 장사를 해 보라”며 명동 제일백화점 옆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에 분식집을 내줬다. 그가 ‘라면 한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1983년 ‘빨계떡’ 라면을 개발한 후부터였다. ‘빨계떡’은 술 좋아하던 그가 해장용으로 개발한 라면이다. 얼큰한 게 당기는 술 마신 다음 날, 라면에 고춧가루를 뿌려 먹었는데 속이 아렸다. 처음부터 고춧가루를 넣고 끓이니 깊은 맛이 났다. 달걀과 떡을 넣고 콩나물과 파, 김 가루를 듬뿍 얹으니 든든하면서도 얼큰하고 시원한 라면이 됐다. 손님들에게 선보이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때부터 다른 메뉴는 정리하고 라면만 팔기 시작했다. 엄청 매운 이 라면은 중독성이 강했다. 외국에 나갔다 이 라면이 생각나 비행기에서 내리는 길로 찾아왔다는 손님이 있을 정도다.

생명도 길었다. ‘틈새라면’이 2001년 프랜차이즈 회사로 발전한 것도, 라면회사와 손잡고 컵라면과 봉지라면을 내놓으면서 편의점과 할인점, 홈쇼핑에까지 파고든 것도 모두 ‘빨계떡’의 독특한 맛 덕분이었다. 라면회사가 만든 라면을 끓여 내놓던 라면집이 자신의 독특한 맛과 브랜드로 라면회사에 역주문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봉지에 넣은 틈새라면은 2월 말 미국시장에 진출한 데 이어 일본, 동남아, 호주 등지로도 나갈 계획이다.


위기를 기회로

25년 라면 한 길을 간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최대 위기는 1989년 우지(牛脂) 파동 때와 1993년 가게 자리를 옮길 때였다. 우지 파동이 나자 그는 라면회사 연구원을 찾아가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손님들에게 “원래 공업용 우지라는 구분이 없는 데다 쇠꼬리, 뼈 등 우리가 몸보신할 때 쓰는 부위에서 나오는 기름”이라고 끈질기게 해명했다. 위기는 기회였다. 사람들이 라면을 다시 찾게 될 즈음 돌아보니 경쟁자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12년간 장사해 오던 자리에서 쫓겨난 1993년은 더 막막했다. 다른 자리를 찾아 다시 문을 열기까지 반년 넘게 걸렸으니, 단골에게도 잊혀질 만한 시간이었다. 그는 비닐봉지를 이용한 홍보 전략을 썼다. ‘틈새라면’의 이전을 알리는 비닐봉지를 제작해 구멍가게와 리어커상에 무료로 나눠 줬다. 이들이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 주면서 자연히 구석구석 홍보가 됐다. 얼마 안 가 ‘틈새라면’은 예전 자리보다 더 북적이게 됐고, 한 달 순수익만 1,000만 원을 넘기도 했다.

처음 시작한 자리가 ‘틈새’이기도 하지만, 그의 장사 전략도 따지고 보면 ‘틈새 전략’이다. 위를 고문하는 것 같은 매운맛의 라면을 비싼 가격에 팔았다. “라면을 싸구려 음식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오기가 생겼다”고 한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찾는 맛과 가격에 맞추지 않고 “우리 라면을 먹을 사람만 먹으라”고 배짱을 부렸다. 그런데 그 라면을 먹겠다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낙천적이고 경쾌한 그의 성격도 중요한 장사 밑천이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특공대 훈련이라고 생각하자”고 했단다. 라면 스무 그릇을 한꺼번에 배달하면서 “헬스클럽 안 가도 알통이 생기니 좋다”고 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신 어머니가 그렇게 한번 푸념 없이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밝고 유머러스한 그는 여고생들 사이에 인기였다. 주변의 부잣집 친구들까지 아르바이트로 일을 도우면서 ‘꽃미남들이 서비스하는 물 좋은 라면집’으로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손님과 종업원이 친구처럼 어울리는 분위기에서 ‘틈새 문화’가 형성됐다.

여덟 살 아래 아내도 ‘틈새’에서 얻었다. 고 1 때부터 단골이었던 아내가 연극배우가 된 후 다시 만났는데, “우리 심심한데 결혼이나 할까?”라는 그의 말을 아내는 제꺽 받아들였다. 부잣집 셋째 딸인 아내가 산꼭대기 화장실도 없는 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며 행복해했던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라면 하나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됐지만 그에게는 라면으로 일군 성공 신화보다 라면으로 맺어진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소중하다. 요즘 그의 꿈은 ‘틈새 쉼터’를 만드는 것이다. 돈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내놓고, 없는 사람은 빈 몸으로 와 아무 격의 없이 돼지 바비큐에 막걸리를 기울일 수 있는 곳. 이를 위해 경기도 양평에 땅도 마련해 놨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님들을 여의면서 그는 일찍이 죽음에 눈을 떴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과 아쉬움, 외로움을 읽었기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가 오랜 화두가 됐는데, 그가 찾은 답은 ‘사람들과 어울려 나누면서 사는 삶’이다.

글 이선주TOP CLASS 기자 | 사진 이창주
  • 2006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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