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비행 경험으로 세계 최고 패러글라이더 만들어요” 송진석 진 글라이더 사장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류의 오랜 꿈. 그 도전 끝에서 탄생한 레포츠가 패러글라이딩이다. 푸른 창공을 향해 캐노피(날개)를 펼치고 오직 바람에만 몸을 맡긴 채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은 한 마리 새가 따로 없다.

유럽에서 시작한 레포츠, 패러글라이딩 애호가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패러글라이더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진 글라이더’ 제품이다. 1998년 이후 패러글라이더 월드컵 대회가 열릴 때마다 우승자는 모두 ‘진 글라이더’에서 만든 패러글라이더를 탔다. 조정 기술 못지않게 기체 성능이 중요한 패러글라이딩 세계에서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진 글라이더의 신 모델이 출시될 때면 각국 딜러들이 값은 보지도 않고 구매에 나선다고 한다. 세계 시장 점유율(30%)도 1위다. 패러글라이더 제조 강국인 스위스, 이탈리아와 맞서 고가 전략으로 맺은 결실이다. 지난 연말 산업자원부가 청와대에서 연 ‘중소기업 정책 혁신 성과 보고회’에서 진 글라이더는 “무모할 정도로 연구개발(R&D)에 많은 돈을 쏟아 부었고 끊임없이 해외시장을 공략한 점이 주효했다”며 우수 사례로 소개됐다.

‘진 글라이더’의 송진석 사장(49세)은 원래 패러글라이딩 선수이자 패러글라이더를 설계하는 디자이너였다. ‘진 글라이더’를 세우기 전부터 세계 패러글라이딩계에서 “송진석이 만들면 다르다”고 인정받으며 디자이너로 이름이 높았다. 푸른 하늘과 그의 인연은 1970년대 말 대학 신입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막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 행글라이더에 빠져 들었다. 행글라이더에 몸을 싣고 날 때면 발 아래 내려다보이는 세계가 별천지 같았다.

하늘을 나는 게 그저 좋았던 그는 대학 3학년 때 사고를 당했다. 비행 중 행글라이더가 추락하면서 얼굴이 으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어머니는 이러다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두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내과 의사인 아버지는 아들이 얼추 몸을 추스르자 두툼한 돈 봉투를 내밀었다.

“싸구려 글라이더를 타다 사고가 난 모양이다. 성능 좋은 걸로 다시 장만해라.”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대학 졸업하자마자 전공(조선공학)을 살려 현대중공업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행글라이더’는 그저 취미로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창공과 그의 인연은 끈질겼다. 그의 이색 취미가 알려지면서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 1983년에는 정몽준 회장이 후원해 독일의 ‘행글라이더 국제 대회’에까지 참가했다. 45개국에서 몰려든 젊은이들이 마음껏 기량을 겨루는 모습을 보고 ‘제대로 한번 배워 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아예 독일로 떠났다. 주 4일은 행글라이더 공장에서 일하다 3일은 마음껏 글라이더를 탔다. 이때는 행글라이딩에 낙하산의 원리를 접목한 패러글라이딩이 개발돼 빠르게 번지는 시기였다. 패러글라이더가 비행하는 평균 고도는 3,000피트. 일반 여객기가 순항하는 높이라 훨씬 높이 날 수 있었다. 기류만 잘 타면 서너 시간 하늘에 떠 있을 수 있었다. 그는 그 매력에 푹 빠져 들었다.

5년여 독일 생활을 접고 귀국하려는데 독일의 한 업체가 “패러글라이더를 함께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배 만드는 게 전공인 데다 오랜 세월 글라이더를 탄 경험, 행글라이더 공장에서의 실무 경험까지 갖췄으니 패러글라이더 디자이너로는 최고의 자격을 갖춘 셈이다.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면서 유럽 각국과 일본 업체들도 “우리 제품을 디자인해 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 한동안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그는 국내 레포츠용품 생산업체에 입사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이 회사에서 그가 만든 패러글라이더를 탄 선수들이 국제 대회를 석권하며 디자이너 송진석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다.


IMF 사태로 실직 후 애호가와 바이어들 도움으로 회사 설립

그러나 1997년 말 IMF 사태가 터지자 그를 포함, 6명의 개발팀이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사람도 싫고, 글라이더도 싫어진 그는 다시는 글라이더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송진석이 패러글라이더 회사를 차리면 투자하겠다”는 전 세계 바이어들이 속출한 것이다. 2,000만 엔을 들고 찾아온 일본 바이어는 “최고의 패러글라이더를 만들어 유럽인이 석권해 온 대회에서 동양 선수를 한번 우승시켜 보자”며 꼬드겼다. 그래도 결심을 못 하고 있는데, 성도 어패럴 최형로 회장이 전화를 해 왔다. 패러글라이딩 마니아인 최 회장은 세계 최고 패러글라이더가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당장 자리 잡을 곳이 없으면 우리 회사 물류 창고를 빌려 주겠다”고 했다.

물류 창고 한쪽을 빌린 그는 패러글라이더 설계에 들어갔다. 경기용 글라이더의 생명은 안전과 속도. 따뜻한 상승기류를 타고 가다 찬 하강기류를 만나면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패러글라이더는 접힌 날개를 얼마나 빨리 펴 다시 속도를 내는가가 관건이다. 설계하고 테스트하고 다시 설계하고…. 힘든 과정을 반복하며 3개월 만에 경기용 패러글라이더 ‘부메랑’을 탄생시켰다. 일본팀은 이 부메랑을 들고 1998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 챔피언 대회에 참가, 이변을 일으켰다. 쟁쟁한 유럽 챔피언들을 제치고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승컵을 안은 것이다. 그해 8월에 열린 패러글라이더 월드컵에서도 부메랑을 탄 일본팀이 우승했다. 전 세계 패러글라이더들의 이목이 쏠리던 1998년 8월 그는 패러글라이더 제조 전문 업체 (주)진 글라이더를 창립했다.

회사 설립 후에는 보다 수요층이 넓은 초보자용 글라이더 설계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안전’이 관건이었다. 0.01%의 불량률을 제로로 만들기 위해 테스트를 거듭했다. 시한을 몇 번씩 넘기면서 마침내 초보자용 시제품 ‘볼레로’를 내놨다. 그는 이 새 글라이더를 들고 세계 각지를 돌기 시작했다. 거친 모래바람이 부는 몽골 초원에서, 하와이의 습기 찬 바닷바람 위에서, 그리고 눈바람이 몰아치는 알프스 산맥에서 성능을 실험했다. 그 과정을 거쳐 “완벽하다”고 자신한 볼레로에 대한 전 세계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대히트였다.

‘진 글라이더’의 모든 제품은 실제 비행에서의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된다. 조종석과 날개를 이어 주는 산줄의 위치가 0.5㎜만 달라져도 비행에서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데, 실전 테스트를 통해서만 완벽하게 보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만드는 패러글라이더에는 30년 비행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 송진석 사장의 자부심이다. 이 때문에 아무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현장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쉰을 코앞에 둔 지금도 거의 매일 하늘을 날아오른다.

세계 최고의 명품으로 인정받으면서 ‘1위 기업’을 지키고 있지만, 그는 요즘도 매출액의 20%를 고스란히 연구개발비에 쏟아 부으면서 ‘더 나은 제품’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기술과 품질만큼은 절대 타협할 수 없다”고 한다. 완벽을 추구하는 만큼 당당히 세계 최고의 가격으로 파는 ‘명품 전략’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 2006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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