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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링선수 양정모

한국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정모야, 욕봤다.”
“아버지, 금메달 땄어요.”
서울과 캐나다 몬트리올을 잇는 전화도 숨이 차 말을 잇지 못했다.
양정모 선수의 승전보를 알리는 중계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감격에 목이 메어 떨렸다.
1976년 광복의 달인 8월 첫 일요일(1일) 아침, 몬트리올에 눈과 귀를 모으고 있던 온 국민은 대한민국 최초의 금메달이 탄생했다는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폭염과 가뭄을 겪고 있어 더욱 그랬다.
금메달 소식이 들리기 며칠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을 아껴 쓰자는 담화문을 냈다.
몬트리올에서 날아든 승전보는 국민의 타는 목을 단비처럼 축여준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도 장대비를 쏟아내 이튿날까지 대지를 적셨다.
양정모 전 선수가 2013년 6월 2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서울올림픽기념관에서 당시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 조선DB
양정모가 금메달을 따기 전까지 한국은 올림픽에 일곱 차례 참가해 은 다섯 개, 동메달 일곱 개를 얻는 데 그쳤다. 양정모의 금메달 소식에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해방 31년 만의 쾌사요, 건국 28년 만의 개가요, 1948년 런던올림픽 처녀 출전 이래 숙망의 달성이요,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한 이후, 실로 40년 만에 맛보는 국민적 감격”이라고 흥분했다.


졌지만 이긴 이유

1976년 8월 1일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레슬링 자유형의 양정모 선수가 한국 최초의 금메달을 땄다. © 조선DB
1976년 7월 31일(현지 시각) 캐나다 몬트리올 모리스리처드 경기장. 금메달 결정전에 양정모가 나섰다. 당시 레슬링은 리그 방식으로 치러졌다. 결선리그에 한국 양정모, 몽골 강호 오이도프, 미국 진 데이비스가 올랐다.

양정모는 진 데이비스를 폴승으로 제압했다. 반면 오이도프는 진 데이비스에게 판정패했다. 당시 채점은 기술을 당한 선수에게 벌점을 주는 방식이었다. 두 어깨가 바닥에 닿는 폴패(敗)는 4점, 판정패는 3점이었다. 양정모는 오이도프에게 지더라도, 폴패만 하지 않으면 우승이 확정돼 있었다.

오이도프는 양정모의 최대 라이벌이었다. 두 선수는 1974년 아시안게임과 1975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이어 3년 연속 메이저대회 결승에서 만났다. 두 맞수의 대결은 그야말로 명불허전. 엎치락뒤치락하는 명승부가 펼쳐졌다.

양정모는 1회전에서 지나치게 신중한 경기를 운영하다가 1점을 선취하고도 이내 1 대 5로 크게 뒤졌다. 2회전 들어 5 대 5 동점까지 추격했지만, 종료 직전 점수를 잃어 5 대 6으로 밀렸다. 마지막 3회전. 8 대 7. 양정모가 드디어 역전에 성공했다. 그러나 환호도 잠시 소극적인 플레이를 하다가 8 대 8 동점을 허용했다. 남은 시간은 1분 12초. 오이도프는 마지막 공세에 나섰고 3점을 더 획득했다.

종료 휘슬이 울리고 심판은 오이도프의 팔을 번쩍 들었다. 승자인 오이도프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패배한 양정모는 껑충껑충 뛰며 기뻐했다. 양정모는 결승리그 벌점 합계 3점으로 오이도프보다 1점이 적었다. 앞서 설명했지만, 폴패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메달 주인공은 양정모였다.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 당시 양정모 선수의 경기 장면. © 국가기록원
《구술로 만나는 대한민국 스포츠인 역사:체육원로 25인의 증언》에는 당시 경기에 대한 양정모의 회고가 나온다.

“10 대 8로 지더라도 내가 금메달이니까. 그때 비디오를 보면 오이도프가 태클 들어와서 내가 택다운을 할 적에 반격할 수 있었다. 만일 내가 1점 차이라도 지면, 금메달이 안 된다 했으면 또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마지막 마무리는 내가 조금 미숙했다. 금메달은 땄지만 아쉬움이 있고….”

신문사들은 앞다퉈 호외를 찍어냈다. 방송사는 축하 노래를 틀었다.

“애국가 우렁차다 올림픽 광장에/ 얼마나 기다렸나 우승의 금메달/ 싸워서 승리한 양정모 선수야/ 그대의 자랑은 대한의 자랑.”


200만 명의 환영 인파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 한국 선수단 개선 환영대회에서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 선수. © 문화체육관광부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에서 한국 최초의 금메달을 따는 등 국가의 기개를 크게 떨친 선수단 일행 72명(임원 22, 선수 50)이 1976년 8월 3일 대한항공 전세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을 태운 KAL 707기가 활주로에 멈춰서자 공군 군악대의 개선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비행기 문이 열렸다.

“대한민국 만세” “선수단 만세” 모여든 1000여 환영객의 환호가 터졌다. 태극기를 앞세운 최재구 단장이 트랩에 나타났다. 이어 김택수 대한체육회장, 금메달을 목에 건 양정모 선수, 은메달리스트 장은경 선수, 동메달리스트 조재기 선수 그리고 여자 배구선수 등 메달리스트들이 뒤를 이었다.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금메달을 따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양정모가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귀국 일성을 밝혔다. 이후 양정모는 마중 나온 아버지, 어머니를 얼싸안으며 “이기고 왔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아버지는 “수고했다. 내 아들아, 욕봤지”라며 어깨를 두드리며 감격해했다.

양정모는 김포공항에서 시청 앞까지 한 시간 동안 카퍼레이드에 동참했다. 카퍼레이드를 보러 나온 200만 명의 환영 인파는 “장하다 양정모” “잘 싸웠다 우리 선수단” 등의 구호를 외쳤다.

양정모는 체육훈장 최고 등급인 청룡장을 받았다. 하지만 서구 국가들이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양정모는 더는 올림픽에 나갈 수 없었고, 결국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조폐공사 레슬링팀 감독으로 재직하다 팀이 해체되면서 야인으로 돌아갔다.


“레슬링은 곧 나 자신”

2003년 7월 레슬링계를 완전히 떠나 역대 동·하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 모임인 사단법인 한국올림픽챔피언클럽 초대 회장에 추대된 양정모는 소년·소녀 가장과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오페라 갈라콘서트를 열었다. 그렇다고 그가 레슬링을 잊은 건 아니다.

“레슬링은 곧 저 자신입니다. 오랜 세월 그러했고, 지금도 우리 레슬링과 후배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양정모의 양쪽 귀는 모두 뭉개져 있다. 연습과 시합 등으로 상대방의 어깨와 매트에 계속 부딪히며 생긴 영광의 상처다. 하지만 그는 레슬링을 선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요즘 양정모는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 10년 전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닌 그는 개인전도 두 차례 열었다.
  •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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