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여왕’ 골프선수 이미림

세리 키즈, 박세리를 뛰어넘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5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ANA 인스퍼레이션(총상금 310만 달러, 약 36억 원) 최종 라운드. 칩인(칩샷을 해서 공을 홀에 넣는 것)으로 버디를 두 개 잡은 덕분에 순위를 2위까지 끌어올린 이미림은 17번 홀(파3)에서 뜻밖에 보기(Bogey, 기준 타수에서 1타를 넘긴 경우)를 범했다. 선두에 2타 뒤진 3위. ‘이번에도 우승과는 인연이 없구나’라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마지막 18번 홀(파5) 두 번째 샷을 남겨둔 이미림은 4번 아이언과 5번 우드 사이에서 망설이다 우드를 골랐다. 아일랜드 그린 뒤편엔 병풍처럼 파란색 대형 광고판이 있었다. 관중석이 있었던 자리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19 탓에 무관중으로 열렸다. 투온(두 번의 샷으로 공을 그린에 올려놓는 것)을 노리고 강하게 샷을 하더라도 이 벽이 막아주기 때문에 공을 물에 빠뜨릴 염려가 없었다. 이미 연습 라운드 때 시도해본 공략법이었다.

대회가 열린 캘리포니아주 란초미라지 미션힐스 골프장의 다이나 쇼어 18번 홀 그린 옆에는 호수가 있다. 우승자는 이 연못으로 뛰어드는 세리머니를 한다. 우승자를 ‘호수의 여왕’ 또는 ‘호수의 여인’이라 부르는 이유다.

홀까지 215야드 남기고, 이미림이 친 샷은 계획대로 광고판에 맞고 떨어졌다. 무벌타 드롭. 골프 규칙에 따르면 페널티 구역을 제외한 전 구역에서 비정상적인 코스 상태로 방해를 받으면 규칙(16-1)에 따라 벌타 없이 구제를 받을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 같은 극적인 승리

‘버디만 하자’는 생각으로 퍼트로 샷을 하려다 웨지를 꺼내기로 마음을 바꿨다. 웨지는 특수한 용도로 쓰는 클럽 중 하나다. 웨지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비거리가 가장 긴 웨지로 장애물이 없는 평탄한 곳에서 사용하는 피칭 웨지(Pitching Wedge), 벙커(모래밭)에서 빠져나올 때 주로 사용하는 샌드 웨지(Sand Wedge), 피칭 웨지와 샌드 웨지의 중간 정도 거리에서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갭 웨지(Gap Wedge), 공을 높이 쏘아올려 그린으로 부드럽게 착륙시켜야 할 때 사용하는 로브 웨지(Lob Wedge)가 그것이다.

이미림은 캐디에게 54도와 58도 웨지를 가져다달라고 했다. 그는 타이틀리스트 보키 디자인 SM8 50도와 54도, 58도 로(Raw) 웨지를 쓴다. 로(Raw)는 마감 코팅을 안 한 제품으로 녹이 잘 슬지만 스핀이 잘 걸린다. 흔히 54도는 샌드 웨지, 58도는 로브 웨지로 분류한다. 이미림은 54도 웨지를 택했다.

“제가 떨어트릴 지점이 되게 멀고 넓었는데 내리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 앞에 떨어트려서 (공을) 약간 굴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54도 웨지를 선택한 이유죠.”

20m 가까이 굴러 내려간 공은 깃대에 맞고 홀인 됐다. 칩인 이글(칩샷으로 홀의 기준 타수보다 2타 적은 타수로 공을 홀에 넣는 것). 웨지를 잘 다루면 실수를 만회할 파 세이브는 물론, 때로는 칩인 버디, 칩인 이글을 터뜨릴 수도 있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다는 골프 고수들의 이야기가 적중한 순간이었다. 공동 1위로 연장전에 들어간 이미림은 세컨드 샷으로 그린을 살짝 넘기고, 칩샷을 홀 1.8m에 붙여 세 명 중 유일하게 버디로 마무리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 경기 종료 직전 22초 동안 5득점을 해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이후 20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결승과 같은 극적인 승리였다.

“우승 퍼팅을 했는데, 당장은 별 느낌이 없었습니다. 실감이 안 났던 거죠. 그런데 카메라와 사람들이 저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니까 순간 연습 과정이나 힘들었던 일이 머릿속을 확 지나가는 거예요. 울컥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안 울려고 했는데, 계속 나왔어요. 저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이미림이 ANA 인스퍼레이션에서 우승한 뒤 캐디와 함께 ‘포피스 폰드’에 뛰어들며 세리머니하는 모습. © 조선DB
손목 부상으로 그만둘 생각까지

이미림은 2010년 국내 투어에 데뷔해 3승을 올린 뒤 퀄리파잉스쿨을 거쳐 2014년 LPGA 투어에 진출했다. 어려운 미국 도전을 피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무조건 큰 무대에 가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2017년 KIA 클래식 우승 이후 왼쪽 손목 부상으로 3년 넘게 우승을 못 했다. 공이 너무 안 맞아 골프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올 시즌 출전한 한국과 미국 세 개 대회에선 모두 컷 탈락했다. 마지막이란 각오로 몸무게를 6~7kg 감량하고, 파3 연습장에서 쇼트게임의 기본을 날마다 훈련했다. 결실은 메이저 우승이었다.

이번 우승이 극적인 것은 하루 한 번도 쉽지 않은 그린 밖에서의 ‘칩인 샷’ 세 개(6번 홀: 칩인 버디, 16번 홀 : 칩인 버디, 18번 홀: 칩인 이글)를 터트려서만이 아니다. 이미림은 사실상 캐디 없이 우승을 일궈냈다. 캐디는 골프선수의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는 몇 안 되는 요인 중 하나다. 선수와 캐디와의 관계를 ‘바늘과 실’ ‘아내와 남편’으로 비유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이번 대회 때 캐디는 사실 제 캐디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같이 일하는 캐디가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고향(뉴질랜드)에 갔다가 나오지 못했어요. 대사관이 문을 닫았다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수소문해서 캐디를 구하고 한두 게임만 부탁했는데, 좋은 성적이 나왔네요. 이번이 첫 게임인데 말이죠.”

이미림은 “원래 캐디분 마음이 좀 씁쓸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승하자마자 ‘정말 축하한다’고 연락이 왔다”고 했다.



골프연습장 운영한 아버지의 영향

광주에서 나고 자란 이미림은 골프연습장을 운영한 아버지(이대성 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골프연습장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어른들을 보면서 신기한 마음에 ‘똑딱 볼’을 치며 골프에 재미를 붙인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에게서 본격적인 레슨 수업을 받으며 골프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이미림이 두각을 드러낸 건 중학교 3학년이던 2005년 에머슨퍼시픽 배 청소년최강전 때였다. 첫 우승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듬해 국가대표 주니어 상비군으로 발탁됐다. 2007년에는 국가대표 상비군, 2008년 국가대표로 선발되며 엘리트 코스를 두루 밟았다. 2009년 프로 무대에 데뷔한 그는 2011년 첫 승을 따냈다. 이후 매년 1승씩 추가하며 ‘기대주’에서 ‘대표선수’로 발돋움했다. 2014년에는 ‘여제’ 박인비를 무너뜨리는 파란을 일으키며 무서운 기세로 성장했다.

박세리의 활약에 자극받아 입문한 이른바 ‘세리 키즈’ 이미림. 그는 박세리가 메이저대회 중 유일하게 넘지 못한 ANA 우승자다. 2007년 우승 경쟁을 하던 박세리는 투온을 노리고 우드로 친 샷이 그린을 넘어 호수에 빠지면서 우승을 놓쳤다. 박세리는 메이저대회 중 ANA에서만 우승을 못 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지 못했다.

박세리 옆에서는 아직도 두근거린다는 이미림. “최소한 (박)세리 언니 나이(만 39세 은퇴)까지는 (골프를) 치고 싶다”는 그는 이제 서른. 아직 10년 가까운 시간이 남았다.
  •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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