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패 복서 최현미

“더 이상 ‘탈북 복서’로 부르지 마라. 나는 대한민국 챔피언이다”

2016년 세계복싱협회(WBA) 여자 슈퍼페더급(58.97㎏급) 챔피언 최현미가 콜롬비아의 다이애나 아얄라를 상대로 타이틀 3차 방어전 경기를 치르고 있다.
이날 최 선수는 10라운드 경기,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방어에 성공했다. © 뉴시스
무심코 켠 TV 방송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저보다 더 열심히 훈련한 선수가 있다면 제 챔피언 벨트를 가져가도 됩니다.”

누군데 저런 엄청난 자신감을 보일까, 하며 SBS 〈집사부일체〉에 집중했다. 주인공은 대한민국 유일의 현 WBA(세계권투협회) 세계챔피언 최현미였다. 1962년에 창설된 WBA는 WBC(세계권투평의회, 1963년 창설)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복싱 단체다.

최현미는 ‘탈북 복서’다. 하지만 필자는 이 기사에서 ‘탈북 복서’란 말을 더는 사용하지 않겠다. 처음 국가대표가 된 열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뛰는 자신을 대변하는 수식어가 ‘탈북’이라는 것에 그 스스로 많은 아쉬움을 표했기 때문이다.

“새터민이라는 걸 부정할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탈북 복서’ ‘새터민 복서’라고 부르면 16년 동안 달았던 태극기가 무시당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이젠 ‘챔피언 최현미’라고 불러주면 좋겠습니다.”

최현미의 아버지 최영춘 씨는 북한에서 무역을 총괄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최현미는 자신을 “다이아 수저”라고 표현했다. 여섯 살 때부터 아코디언을 연주했고, 부모는 사랑스러운 딸이 음악을 하길 바랐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열한 살 때 운명이 바뀌는 상황을 맞았다.

“2001년 평양 장원고등중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복싱 감독님이 체육 시간에 저를 보고 스카우트했어요. 키도 큰 편이고, 달리기도 잘했거든요.”

처음부터 복싱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또래 친구들이 글러브 끼고 권투를 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한편으론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의 허락이 없어 아코디언을 메고 몰래 복싱장을 다녔다.

능력을 인정받은 최현미는 열세 살이 되던 2003년 김철주사범대학 복싱 양성반에 들어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발탁된 것이었다. 최현미는 입단하자마자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재능은 부모의 마음도 돌려놨다.


북한의 다이아몬드 수저, 영화 같은 탈북

2011년 12월 15일 서울 광진구 중곡동 동부은성체육관에서 언론 인터뷰 중인 최현미. © 뉴시스
2004년 아버지가 여행을 가자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기차를 탔다. 이상하게 계속 이동을 했다. 12월에 출발한 탓에 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한 달 뒤 도착한 곳은 여름이었다. 베트남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와본 해외였다.

“아빠, 여기 너무 좋다. 여기서 살면 안 되나?”

어느 날 아버지는 금방 데리러 온다고 하며 떠났다. 그렇게 만 4개월을 베트남에 갇혀 지냈다.

“가족들과 같은 방에 있었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 오빠는 다른 호텔로 데려가고 저와 엄마만 같이 있었습니다. 아빠와 오빠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어요. 영화 〈올드보이〉처럼 창을 이불로 막고 밥 나오면 먹고, 나가지 못한 채로 4개월 갇혀 있다가 비행기 탈 때 돼서 아빠와 오빠를 만났어요.”

2004년 7월 27일 가족들은 전세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두 남매에게 말했다.

“너희한테 이런 세상도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으로 온 최현미는 권투를 그만두고 다른 삶을 살려고 했다. 그러나 새터민이라는 이유로 받는 편견 어린 시선들, 힘들게 일하는 부모를 보며 호강시켜주기 위해 다시 권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연히 엄마가 감자탕집에서 설거지하는 모습을 봤어요. ‘성공하고 싶다’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잘할 수 있는 게 복싱이었고, 다시 글러브를 끼게 됐습니다.”

한국에 온 지 4년 만인 2008년, 열여덟 살의 최현미는 WBA 여자 페더급 세계챔피언이 됐다. 최연소였다. 영국, 독일, 일본에서 귀화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태극기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했습니다. ‘나 이제 대한민국 국가대표야’라는 생각이 너무 강했고, 만족했습니다.”


무적 복서의 슬픔

최현미 선수는 2016년 3월 27일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여자 슈퍼페더급 타이틀 3차 방어전에서 성공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 뉴시스
2008년부터 일곱 차례나 타이틀을 지킨 최현미는 챔피언 벨트를 자진 반납했다. 페더급에는 더 이상 적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013년 슈퍼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적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슈퍼페더급 세계챔피언 벨트 역시 최현미 것이 됐고, 이후 또 일곱 차례 방어에 성공했다. 최현미는 13년 동안 17전 17승을 기록했다. 무패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그가 복서로 산 지도 벌써 20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위치지만, 최현미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스폰서를 구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WBA 챔피언은 규정상 전 대회를 치르고 6개월 이내에 타이틀 방어전을 해야 한다. 방어전을 치르지 못하면 타이틀을 반납해야 한다. 그런데 방어전을 치르려면 1억 2000만 원에서 1억 5000만 원가량이 필요하다. 본인과 도전자뿐 아니라 메인 타이틀전에 앞서 진행하는 오픈게임 참가 선수 대전료, 심판 비용 등을 모두 챔피언 측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싱이라는 스포츠가 대한민국에서 비인기 종목이 됐습니다. 그래서 스폰서 잡기가 매우 어려워요. 아빠가 뛰어다니면서 ‘저희 딸 챔피언 자리 뺏기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하고 고개 숙여가며 후원을 받고 있어요. ‘이게 과연 효도인가,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죠.”


무기한 연기된 통합 타이틀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 2월 22일 미국에서 국제복싱연맹(IBF) 슈퍼페더급 챔피언인 마이바 하마두체(프랑스)와 통합 타이틀전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경기가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경기 일주일 전 코로나19로 타이틀 매치가 무기한 연기될 것이란 소식을 접했어요.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죠. 한국 첫 통합 챔피언이란 타이틀을 꼭 달고 싶어 3개월 동안 아무도 안 만나고 경기 준비만 했어요. 온종일 훈련만 했는데, 너무 허무했죠.”

금전적인 피해도 봤다. 미국에서 훈련을 진행 중이었는데, 경기가 무기한 연기되면서 숙박비와 트레이너 비용 등을 메울 방법이 없어졌다. 우울할 법도 한데 최현미는 이내 자신 있게 목표를 밝혔다.

“대한민국 챔피언 최다 방어가 17차인데 제가 14차입니다. 세 번만 더 방어하면 대한민국 복싱 역사가 바뀝니다. 저는 그 길을 갈 겁니다. 정말 시원하게 태극기를 날리겠습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50전 전승의 ‘무패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는 최근 10년 새 가장 돈을 많이 번 운동선수 1위에 꼽혔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수입액이 9억 1500만 달러(약 1조 800억 원)에 달해 주먹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평균 50만 달러(약 5억 9000만 원)를 벌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대한민국의 유일한 무패 복서 챔피언인 최현미는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최소한 챔피언 대접은 제대로 받아야 하지 않을까.
  • 202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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