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기성용

‘상암의 왕’ 기라드가 돌아왔다

2019-2020시즌 영국프리미어리그(EPL)에서 우승한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인 스티븐 제라드(Steven Gerrard)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수비형 미드필더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사했던 그는 이후 노쇠화로 인해 수비형 미드필더로 변신했는데, 자로 잰 듯한 롱 패스를 선보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국 축구에도 제라드처럼 정확한 패스와 넓은 시야, 공격수의 마음을 잃는 조율 감각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선수가 있다. 바로 기성용이다. 그의 플레이는 제라드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기라드(기성용+제라드)’다.
기성용은 세 번의 월드컵과 두 번의 올림픽에 출전하며 A매치 110경기 10득점을 기록했다.
특히 2015년 아시안컵과 2018년 월드컵에서는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서 대한민국 축구를 이끌었다. © 조선DB
간단한 문제 하나. 축구 경기가 끝났다. A팀이 B팀을 2-0으로 꺾었다. A팀은 주도권을 틀어쥐고 계속 밀어붙여 두 골을 뽑았다. 실점 위기는 한 번도 없었다. 누구를 승리의 주역으로 꼽을 것인가. ① 골을 넣은 공격수 ② 실점 없이 막은 골키퍼 ③ 수비형 미드필더.

다수의 일반인은 ①번 골을 넣은 공격수를 꼽겠지만 감독들의 시선은 다르다. 대부분 감독은 이런 경기에서 수훈선수로 ③ 수비형 미드필더를 꼽는다. ①번이 왜 승리의 주역이 아니냐고? 경기를 완전 장악하고도 두 골밖에 뽑지 못했기 때문이다.

축구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이 있다. 공격과 수비 양면에 걸쳐 경기 승패를 좌우하는 위치다.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지만, 수비형 미드필더의 경기력은 곧 팀의 승패와 직결되기도 한다. 한 프로축구팀 감독의 이야기다.

“수비형 미드필더는 눈에 많이 띄지 않아야 한다.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제 몫만 하면 경기는 절대 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스트라이커는 골을 가져다주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는 승리를 선사한다”라는 말이 있다. 기성용은 대표팀에서 활동할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의 전설 제라드처럼 척추 역할을 했다. 왕성한 활동량으로 대표팀의 ‘공간 압박’ 전술을 구현할 키 플레이어(Key Player)인 동시에 창조적이고 정확한 패스, 강력한 중거리 슛까지 겸비해 역습 공격의 시발점을 만들기도 했다.

성적도 화려하다. 기성용은 세 번의 월드컵과 두 번의 올림픽에 출전하며 A매치 110경기 10득점을 기록했으며, 2015년 아시안컵과 2018년 월드컵에서는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서 대한민국 축구를 이끌었다.


축구인 아버지 권유로 초3 때 시작

FC서울 기성용이 지난 7월 2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입단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응하고 있다. © 조선DB
최근 한국 축구 팬들이 환호할 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아시아 출신 수비형 미드필더는 유럽 빅 리그에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편견을 깬 기성용이 프로축구 K리그 FC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11년 만이다.

기성용의 컴백에 대해 그의 선배 하대성은 “진짜 ‘상암의 왕’이 돌아왔다”고 평가했다. 올해 초 은퇴하고 해설위원으로 새 출발을 알린 FC서울 출신 하대성은 “며칠 전에 기성용에게 전화해서 지금 서울의 위기를 잘 이겨내주길 바란다고 응원의 말을 전했다”고 말했다.

기성용이 축구를 처음 시작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광양제철고 축구부 감독이었던 부친 기영옥 씨는 순천중앙초 정한균 감독에게 아들을 맡겼다. 기본기 훈련에 충실한 정 감독의 축구 철학을 믿었기 때문이다.

축구인이었던 아버지의 기준에 기성용은 많이 미흡했다. 4학년 말까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자 아버지는 정 감독에게 “축구를 그만두고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축구 선배이기도 한 그에게 “형님은 고등학교 지도자고 초등학교는 제가 전문가”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형님, 성용이는 이 단계만 넘으면 크게 될 선수니까 조금만 더 지켜봅시다.”

정 감독의 설득에 아버지는 반신반의하며 돌아갔지만, 과연 정 감독의 촉이 맞았다. 기성용은 초등학교 5학년 말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6학년 때는 전국소년체전 금메달과 최우수선수(MVP)를 휩쓸고, 차범근축구대상을 받으며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정 감독은 지금도 기성용의 아버지를 만나면 “그때 형님 말 듣고 축구 그만뒀으면 어떡할 뻔했느냐”고 핀잔을 준다.


중1 때 호주 유학, 유럽 진출의 토대

기성용의 부친 기영옥 씨. © 조선DB
정 감독에 따르면 기성용은 어렸을 때부터 승부욕이 대단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다른 학교와 연습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용이가 경기 중에 공을 손으로 잡아 학교 밖으로 뻥 차버리더군요. 왜 그랬냐고 물으니, 자신에게 볼을 잘 주지 않아 화가 났다고 하더라고요. 혼을 내긴 했지만, 속으로는 ‘이놈, 욕심 봐라’ 하며 승부욕을 눈여겨봤죠. 그런 축구 욕심이 있었기에 지금의 기성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높이 올려 차는 ‘뻥 축구’가 대부분인 초등학교 축구에서 기성용은 패싱 플레이를 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제자인 ‘패스 마스터’ 윤정환(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 감독)과 고종수(전 대전시티즌 감독)의 플레이를 즐겨 본 영향이 컸다.

광양제철중학교에 입학한 기성용은 1학년 때인 2001년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축구 유망주를 브라질과 유럽으로 보내는 경우는 많았지만, 호주 유학은 생소한 사례였다. 아버지의 판단은 이랬다.

“선수로 잘 성장하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영어라도 잘해 밥벌이라도 하라는 차원에서 보냈습니다.”

호주 유학은 기성용의 성장을 도왔다. 이미 기본기는 잡힌 상황이었고, 좋은 잔디 위에서 규칙적인 운동량을 소화하며 기량을 발전시켰다. 그때 배운 영어는 후일 유럽에 진출하는 데 큰 무기가 됐다.


다시 K리그로, 기라드의 귀환

2006년 한국으로 돌아와 금호고를 졸업하고 FC서울에 입단한 기성용은 터키 출신의 명장 세뇰 귀네슈 감독의 신뢰 속에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동갑내기인 이청용과 함께 ‘쌍용’으로 불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만 17세이던 2006년, FC서울에 입단한 첫 해 한 경기도 뛰지 못했던 기성용은 2007년 22경기를 뛰며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2008년에는 27경기 4골 2도움을 올리며 FC서울의 주축이 됐다. 2009년에는 31경기 출전, 4골 10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최고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같은 해 FC서울을 떠나 스코틀랜드 셀틱FC로 이적한 기성용은 이후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 스완지 시티, 선덜랜드 그리고 뉴캐슬에서 뛰며 경쟁력을 입증했다.

지난 7월 2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입단식에서 기성용은 등번호 8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환하게 웃었다.

“긴 시간 기다려왔고, K리그에 서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드디어 K리그에 오게 돼 행복하고 기대도 많습니다.”

기라드 기성용의 축구 인생에 중요한 2막이 열렸다.
  • 202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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