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을 훔친 영화人 〈9〉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

이토록 아름다운 여전사라니!

tvN 주말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종영 후에도 여전히 화제다. 자폐인 친형과 형만 감싸고돌았던 엄마 때문에 삶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정신병동 보호사 강태(김수현) 그리고 다분히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가진 엄마와 무기력한 아빠 밑에서 비정상적 과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동화작가 문영(서예지)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가는 내용이다.

드라마는 여성 시청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르인 로맨틱코미디에, 주인공 엄마의 살인이라는 스릴러 요소를 가미한 설정, 또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해진다는 김수현의 ‘미모’ 등 흥행의 삼박자를 두루 갖췄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진정한 참신함은 여주인공 문영의 캐릭터 설정에 있다. “너 예쁘게 생겼다. 갖고 싶어” “내 옆에서 자. 안 건드릴게” “그 슈트 입지 마. 다른 년들이 너를 탐내게 만들잖아” 등 남자들이 던질 법한 대사가 집(사실 집이라 부르기엔 너무 거대한 성)에서도 드레스와 풀메이크업을 하는 도도한 여주인공의 입에서 거침없이 터져나온다. 생각해봐라. 그걸 바라보는 여성 시청자들의 (대리만족에 따른) 통쾌함을.

“인류 역사는 여성이 인권을 획득하기까지의 고난의 역사”라는 말도 있지만, 여성은 근대는 물론,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남자들이 누리는 당연한 권리를 순전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박탈당했다. 민주주의의 전범(典範)처럼 여겨지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회에서 여성은 아예 시민이 아니었고, 따라서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 감독의 〈올드가드〉(2020)
18세기 서유럽의 시민혁명을 계기로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대두되면서 비로소 모든 국민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와 정확히 궤적을 같이하는 가부장제(patriarchy) 탓에 ‘정치적 각성’이 있었음에도 여성에게는 가정 안에서의 역할만 강요될 뿐 참정권은 보장되지 않았다. 가장 진보적인 정치체제를 가진 영국에서조차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은 1928년에 이르러서였다.

‘꿈의 공장’이라 불리는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에서 여배우가 차지하는 위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배우 없는 영화는 없지만, 여배우가 메인인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페미니즘 영화의 선구로 꼽히는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감독 리들리 스콧, 1991)를 제외하면 1990년대까지도 할리우드에서 여배우는 남자 배우나 스토리를 빛내기 위한 ‘장식’ 수준에 머물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뉴 시네마의 지평을 연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The Graduate, 1967)은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의 영화이지, 앤 밴크로프트(Anne Bancroft)의 영화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대목에서 “미시즈 로빈슨 만세”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디오르’의 어두운 과거

패티 젠킨스 감독의 〈몬스터〉(2003)
이런 할리우드에서 비록 최초는 아닐지 몰라도,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여배우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이가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 1975~)이다.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가 아닌 여성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던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열혈 페미니스트다.

샤를리즈 테론이 페미니스트가 된 데에는 그의 성장 과정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는 엄마와 외동딸이던 그를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최악의 남자였다. 남아공판 ‘백인 쓰레기(white trash)’인 셈. 급기야 샤를리즈 테론이 열여섯 살 때 아버지는 폭행 도중 딸이 숨어 있는 방 쪽으로 총을 세 발이나 쏘았고, 이를 본 엄마는 아버지를 쏘아 죽였다. 딸은 불행히도 이 모든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177cm 장신으로 모델 활동을 통해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는 이후 자신의 가정 이야기를 각색해 만든 〈몽유병〉(Sleepwalking, 감독 빌 마허, 2008)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고, 조연급으로 직접 출연했다. 2004년 이후 ‘인간 디오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압도적 몸매와 미모로 17년째 디올 자도르(Dior J’adore) 향수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샤를리즈 테론. 연기자로서 그의 진가는 〈몬스터〉(Monster, 감독 패티 젠킨스, 2003)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미국의 여성 연쇄 살인범이자 퇴물 매춘부인 에일린 워노스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여성 간의 사랑을 묘사해서 퀴어 영화로도 분류된다. 이 작품에서 테론은 그동안 따라다녔던 여신 캐릭터를 과감히 내던졌다. 몸무게를 15kg 찌우고, 눈썹을 밀었으며, 틀니를 끼우고, 로션조차 바르지 않아 피부를 망가트린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가 연기한 워노스의 삶은 끔찍하고 불우한 인생 그 자체였다. 여덟 살 때 아버지 친구에게 강간당하고, 열세 살 때부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창녀의 길로 나서야 했다. 상대의 위험스런 가학 섹스를 피하려다 첫 살인을 저지르고, 이후 여섯 명의 고속도로 운전자들을 살해한 끝에 2002년 플로리다형무소의 전기의자에 앉은 여성.


평단과 대중의 고른 지지

제이 로치 감독의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2019)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격 변신한 샤를리즈 테론의 입에서 “난 한 번도 선택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 “인생은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아”라는 대사가 천년 묵은 회한처럼 흘러나올 때, 관객들은 그 압도감에 한숨조차 내쉴 수 없었다. 허기와 추위를 해결하는 일이 삶의 전부였던 에일린 워노스에게 사랑하는 상대가 생기자,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거듭한다. ‘비참’이라는 말로는 10분의 1도 담을 수 없는 처절한 인생. 그가 꺼낸 최후의 발언은 곱씹을 만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하지. 구름 뒤에도 햇살은 있어. 신념은 산도 움직일 수 있고. 사랑은 언제나 길을 찾아.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고.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지(Love conquers all.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Faith can move mountains. Love always find a way.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Where there is life, there is hope).”

데이빗 레이치 감독의 〈아토믹 블론드〉(2017)
이 영화에서 신들린 연기를 펼친 샤를리즈 테론은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과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끔찍한 삶을 살았던 에일린 워노스를 연기하면서 자신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평단과 대중의 지지를 모두 얻은 샤를리즈 테론은 이후 메시지가 짙은 영화를 많이 찍었다. 2015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감독 조지 밀러)에서 여전사 퓨리오사 역으로 ‘사실상 진짜 주인공’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2019년에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Bombshell, 감독 제이 로치)에서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대립하는 폭스뉴스 간판 앵커였던 메긴 켈리 역을 맡아 올 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여권 신장의 역사에서 여성의 의식 개혁, 특히 여성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의식 개혁이 관건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샤를리즈 테론의 대표작은 꼭 챙겨볼 것을 권한다. 참으로 귀한 배우다.
  • 202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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