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을 훔친 영화人 〈3〉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

그가 메가폰을 잡으면 역사가 된다

영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평가자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크게 봐서 연출자가 영화를 제작할 때 스토리에 치중하는 경우와 화면의 완성도에 집중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한국 감독을 예로 들자면, 〈공공의 적〉 〈실미도〉 등을 만든 강우석 감독은 화면 구성보다는 전체 스토리 전개에 치중하는 편이다. 충무로에서는 강 감독이 영화제 촬영상 같은 건 애당초 포기하고 카메라를 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반면 〈달콤한 인생〉 〈밀정〉을 연출한 김지운 감독은 미장센을 중히 여긴다. 작품마다 색감 활용, 조명 효과, 세트 디자인 등에 상대적으로 공을 많이 들인다.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는 영국 감독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1937~)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한다. 그의 대표작이자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음향효과상, 시각효과상, 의상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한 〈글래디에이터〉(Gladiator, 2001)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강렬한 이미지로 승부하는 CF 감독 출신이라는 사실에 크게 힘입는다.

영국 사우스실즈(South Shields)에서 출생한 스콧은 웨스트하틀풀예술학교(West Hartlepool College of Art)를 졸업한 뒤 영국 공영방송 BBC의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TV 드라마 시리즈물을 연출하다가 프리랜서로 독립, 광고회사를 설립하고 10여 년 동안 광고 제작자로 이름을 알렸다. 웬만한 촬영 보드 콘티는 직접 꼼꼼하게 그릴 정도였다. 스콧이 ‘비주얼리스트’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영화의 시각적 측면에서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주는 것은 다분히 그의 젊은 시절 이력 덕분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리들리 스콧의 출세작은 〈에이리언〉(Alien, 1979)이다. 국내에서는 1987년에 개봉했다. 망망대해 우주를 떠도는 거대한 우주 화물선, 최소한의 승무원, 기분 나쁜 극도의 정적, 어둡고 불길한 통로, 역겹디역겨운 금속성 생명체….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는 포스터 문구를 시각화한 〈에이리언〉은 필자로 하여금 영화라는 매체의 영향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SF 호러 계열에서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에이리언〉은 속편들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각자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로 유명한 제임스 카메론, 데이빗 핀처, 장 피에르 주네가 메가폰을 잡았다. 리들리 스콧을 비롯해 모두 내로라하는 간판급 감독들이지만 에이리언 시리즈를 찍을 당시에는 모두 신인이었다. 감독은 계속 바뀌었지만 주인공 엘렌 리플리 역을 맡은 여배우 시고니 위버는 1편부터 4편까지 전부 출연했다.


저주받은 걸작 〈블레이드 러너〉


〈에이리언〉으로 화려하게 할리우드에 입성한 리들리 스콧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은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다. 필립 K. 딕의 SF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더불어 SF 영화의 역사적인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개봉 당시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실패했지만 일부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이후 높은 평가를 받은,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별칭을 가진 〈블레이드 러너〉는 리들리 스콧의 비주얼리스트적 특장(特長)이 잘 드러난 영화다. 어둡고 혼란스러운 미래를 묘사하려다 스토리와 캐릭터마저 불분명하고 모호해졌다는 초기 혹평들 속에서도 “독창적인 비주얼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건 리들리 스콧 특유의 비주얼에 대한 완벽주의 성향 덕분이었다.


그는 원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수도 없이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찍었고, 디자인이나 소품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다. 영화에 나오는 미래 도시의 모습은 CG가 아닌 미니어처 등을 이용해 직접 촬영한 것이다. 영화 초반 웅장하게 등장하는 타이렐사(社) 건물은 실제 1m 높이의 모형이었고, 미래형 자동차 ‘스피너’도 일일이 다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세트와 모형의 질감과 색채가 서로 맞지 않아 화면이 매끄럽지 않을 때는 여기에 연기를 깔고 비를 뿌렸다. 밤 배경이 많아 어둡고 칙칙한 상태에서 빛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는데, 시각적 강조를 위해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들이 발하는 불빛이 빛의 파장을 만들게끔 치밀하게 계산했다.

영화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 인간 ‘레플리칸트(Replicant)’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성의 정의를 묻는다. 후속 편인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감독 드니 빌뇌브, 2017)는 무려 35년 만에 제작됐다.


80대 현역


리들리 스콧 영화의 가장 큰 공통 요소는 ‘파워 오리엔티드(power oriented)’라 이름 붙일 만한, ‘힘’ 내지 ‘강함’의 추구다. 〈사랑과 영혼〉의 청순 여성 대명사 데미 무어를 삭발 근육질 여군으로 탈바꿈시킨 〈지. 아이. 제인〉이나 〈글래디에이터〉가 대표적인 예다. 두 여성이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로드무비 〈델마와 루이스〉 또한 남성 중심의 기성 제도를 거부하고 적극적 죽음을 택하는 여성들의 ‘당찬’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델마와 루이스〉가 비평과 흥행, 모두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가부장적 남성 패권주의의 폐해를 다뤄서가 아니라, 그 시스템을 거부하며 죽음을 불사한 여성을 보여준 까닭이다.

역사물의 한 장을 연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예루살렘 왕국을 구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르는 발리안(올랜도 블룸), 극도의 사실주의 묘사로 전쟁영화의 전범이 된 〈블랙 호크 다운〉에서 소말리아에서 사투를 벌이는 미군 특수부대원들, 갱스터 무비에 한 획을 그은 〈아메리칸 갱스터〉에서 뉴욕 할렘 암흑가의 권력 개편을 노리는 조직 보스 루카스(덴젤 워싱턴)와 마약 범죄 소탕에 인생 전부를 건 형사 로버츠(러셀 크로우) 등이 모두 그러하다.

83세의 고령에도 연출은 물론 제작자, 기획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리들리 스콧. 그가 여전히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건 아마도 현대인들이 가슴 한편에 묻어둔 ‘힘에 대한 동경’을 스크린을 통해 대리만족시켜준 덕분일 것이다.
  • 2020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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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Truman   ( 2020-03-17 )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1
리들리 스캇 감독 영화 중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Counselor"와 "Body of Lies"가 빠진 것이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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