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을 바꿀 영화 〈27〉 〈미스 슬로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생도 로비스트도

‘로빙(lobbying)’은 각종 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주로 입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우리는 통상 ‘로비’라고 표기하나 정확한 영어 표현은 ‘로빙’이다. ‘호텔 로비’라는 용법으로 많이 사용하는 로비(lobby)는 대기실, 복도 등을 지칭하므로 당초 의사당 복도 등에서 상주하며 의원들을 접촉하는 행위가 로빙인 셈이다.

로빙을 펴는 로비스트(lobbyist)는 대부분 국가의 수도나 주(州) 또는 지방 정부의 소재지에 상주한다. 의사 절차, 의원 규칙, 법안의 심의 상황 등을 팔로업해 그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 평소 접촉해온 의원이나 그들 선거구의 유력자, 공무원 등에게 호의를 베풀거나 압력을 가하는 수단을 행사한다. 미국의 경우, 워싱턴에 상주하는 로비스트는 2차 대전 중인 1944년 2만 명에 달해 정점을 찍었고, 2018년 10월 기준 미 연방의회에 등록된 로비스트 수는 1만 920여 명에 이른다. 여러 폐해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로비 활동은 국민의 여러 계층과 국회, 관청 사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로비 활동이 합법화된 국가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 등이다. 그 외에는 법으로 금지한다. 한국과 일본은 일체 금지 국가다. 우리나라에서도 로비스트 합법화를 위한 공론화 과정이 있었지만, 일반 국민들의 로비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커 법안도 올려보지 못하고 사장된 상태다.


로비스트의 명암을 다룬 영화


로비 활동의 명암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가 〈미스 슬로운〉(Miss Sloane, 감독 존 매든, 2016)이다. 총기 난사와 같은 폭력 장면은커녕 책상 한 번 내려치는 장면도 없지만 132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과 스릴을 느끼게 만드는 영화다.

〈제로 다크 서티〉(2012)에서 곤경에 처한 FBI 요원으로 나와 호연을 펼쳤던 제시카 차스테인이 주인공 엘리자베스 슬로운 역을 맡아 연기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인터스텔라〉와 〈마션〉에서 우주인으로 등장했던 그녀는 〈미스 슬로운〉에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정하고 주도면밀한 로비스트 변호사로 변신, 제74회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드라마 부문) 후보에 올랐다.

영화는 워싱턴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이 상원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슬로운은 소속 로빙펌 사내 변호사인 다니엘(데이빗 윌슨 반스)로부터 청문회 대비 조언을 듣고 있다.

다니엘은 슬로운에게 미국 수정헌법 5조를 이용해 선서나 인적사항 확인을 제외한 모든 답변을 거부하도록 조언한다. “하나라도 진술하게 되면 모든 질문에 답변해야 하기 때문에 청문회 의원들이 ‘간디조차도 혀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나게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영화는 이처럼 상원 청문회에 임하는 슬로운의 모습과 청문회까지 이르게 된 슬로운의 활동을 두 개의 축으로 삼는다. 따라서 청문회에서 자주 언급되는 수정헌법 5조에 대한 기본 지식을 알고 보면 좋다.

미국 헌법의 본체는 1787년 제정돼 오늘날까지도 수정 없이 보존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헌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현재까지 27개의 새로운 조항이 추가됐는데, 이 추가 조항을 ‘수정(Amendment)헌법’ 또는 ‘수정조항’이라 한다. 이 가운데 1789년에 발의돼 1791년 발효한 수정헌법 제1조부터 제10조까지를 보통 ‘미국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이라고 한다.

수정헌법 5조는 형사 사건에서 시민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 첫 문장은 “누구라도, 대배심에 의한 고발 또는 기소가 있지 않는 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 또는 파렴치 죄에 관해 심리를 받지 않는다(No person shall be held to answer for a capital, or otherwise infamous crime, unless on a presentment or indictment of a grand jury)”이다. 한마디로 중대 범죄가 아닌 한 피의자는 답변 거부 등 제반 수단을 통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수정헌법 5조가 뭐길래


상원 청문회에 출석한 슬로운은 청문회 의장인 상원 의원 스펄링(존 리스고)으로부터 이전 직장인 로비회사 콜-크래비츠에서의 업무와 인도네시아 팜유(palm oil) 관세 로비와 관련해 질문 세례를 받지만, 다니엘의 조언에 따라 수정헌법 5조를 반복 언급하며 모든 답변을 거부한다.

영화는 이제 3개월 1주 전으로 돌아간다. 콜-크래비츠에서 인도네시아 팜유 관세 로비를 책임진 슬로운은 비서 제인(알리슨 필)을 시켜 법안 제안자인 제이콥스 의원에게 인도네시아 가족여행을 선물함으로써 법안을 철회하도록 한다. 여행 경비를 인도네시아 정부가 대기 때문에 미국 로비법 체제에서는 명백한 불법이지만 비영리 단체를 중간 매개로 해서 ‘후원’ 형식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같은 날, 미국 정계의 거물 상원 의원인 빌 샌포드가 콜-크래비츠를 찾는다. 샌포드는 슬로운에게 총기 구입 시 신원 조사를 의무화하는 법안인 ‘히튼-해리스 법안’을 막기 위해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여성들의 찬성을 이끌어달라고 부탁한다. 로비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 슬로운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거절한다.

그날 저녁 슬로운은 워싱턴 명사들의 디너파티를 끝내고 귀가하던 중 히튼-해리스 법안 찬성 측 로비회사인 피터슨-와이엇의 CEO 루돌프 슈미트(마크 스트롱)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는다. 슬로운은 “히튼-해리스 법안 찬성을 로비하는 피터슨-와이엇이 절대 이길 수 없는 건 법안 찬성 측 총예산이 총기 찬성 로비 측의 구두 닦는 비용보다 적기 때문”이라며 거절한다. 하지만 슈미트는 “신념에 찬 로비스트는 자신의 승리 능력만을 믿을 수는 없다(A conviction lobbyist can’t only believe in their ability to win)”는 메모를 건네며 그녀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다.


이튿날 슬로운은 아침 회의에서 총기 규제 법안 로비를 위해 회사를 떠나 피터슨-와이엇으로 갈 것이라며 동참할 사람을 모집한다. 네 명이 따라나서고, 셋은 남기로 한다. 그중 당연히 같이 갈 것으로 여겼던 비서 제인이 “슬로운 당신은 3류 회사인 피터슨-와이엇에 가서 캠페인을 망쳐도 유명세 덕분에 재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면서 체류한다. 슬로운은 학자금 대출을 청산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 콜-크래비츠에서 일하고 있는 제인에게 “너는 나 없이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거다. 워싱턴 정가가 너의 내장을 꺼내 목을 졸라도 나는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폭언을 던지며 떠난다.

장면은 다시 청문회장. 청문회를 이끌고 있는 스펄링 상원 의원은 슬로운의 사생활까지 들먹이며 약물 남용으로 공격한다. 실제 그녀는 고질적인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몰아치는 인신 공격적 질문에 평정심을 잃은 슬로운은 스펄링의 ‘아시아 인도네시아 공화국(the Asian’ Republic of Indonesia)’이라는 거슬리는 표현 사용에 마침내 폭발한다.

슬로운 : 나는 약물 중독자가 아니며, 워싱턴의 많은 정치인들이 각종 약물을 상시 복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공화국이며 단지 위치가 아시아 대륙에 있는 나라이다.

그러자 청문회장 장내가 술렁이고 지켜보던 보도진은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들기며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슬로운이 스스로 수정헌법 5조를 포기하고 만 것이다. 그러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스펄링이 말한다.

“잔치에 온 걸 환영합니다.”

그 직후 둘만 남은 썰렁한 복도에서 슬로운과 변호사 다니엘이 나누는 대화는 미국 현실 정치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니엘 :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 지른다) 유치한 재담에 속아 수정헌법 5조를 포기하다니 제정신이오? 앞으로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게 되면 최소 5년형인 의회 위증죄로 처벌받을 거요.

슬로운 : 아무 답변도 안 하면 되잖아요.

다니엘 :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신 눌러대면서) 그러면 의회 모욕죄로 처벌받게 될 거요.



변호사가 직접 쓴 시나리오


최근 낙마한 법무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떠올려보면 우리 정치판과 미국의 정치 현장이 얼마나 극명하게 대조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청문회에서 진술 일부가 거짓으로 드러났음에도 그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에 의해 기어이 법무장관직에 올랐다.

이어지는 줄거리는 생략하려 한다. 내용을 알고 보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재미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독자들이 무엇을 예상하든 그것은 보란 듯이 비껴갈 것이다. 다만 슬로운의 청문회 최후 진술은 옮기고 싶다.

“이 나라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죠. 양심에 따라 투표하는 정직한 의원에게 보상하지 않고 쥐 같은 자들에게 보상이 돌아가죠. 자기 자리만 보전하면 나라도 팔아먹을 자들에게요. 실수하지 마세요. 이 쥐들이 미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기생충입니다.”

각본이 아주 훌륭한데, 시나리오를 쓴 조나단 페레라는 실제 영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한 인물이다. 감옥까지 다녀온 어느 로비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페레라는 흥미롭게도 우리나라에서 영어 강사를 하며 각본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열한 명의 로비스트를 만나 캐릭터를 연구했다는 제시카 차스테인이 배우 인생 최고의 명연기를 펼친다.

Scene in English 명대사 한 장면

영화 오프닝 신은 상원 청문회에 불려 나온 워싱턴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이 15년의 로빙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를 진술하는 장면이다.



슬로운: 로비는 통찰력과 관련된 활동입니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대응책을 고안해야 합니다. 승자는 적보다 한 걸음 앞서 나아가야 하지요. 상대방이 패를 꺼낸 후에야 승리의 카드를 내보이는 겁니다. 당신은 확실하게 상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을 놀래지 않지요.

Lobbying is about foresight. About anticipating your opponent’s moves and devising counter measures. The winner plots one step ahead of the opposition. And plays her trump card just after they play theirs. It’s about making sure you surprise them. And they don’t surprise you.

슬로운의 이 말은 단순한 진술에 그치지 않고, 영화가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전개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로 치달을 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스토리와 맞아떨어진다. 이 영화의 주제이자 플롯을 이끌어가는 메인 축이다.
  •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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