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속구 지존’ 조던 힉스와 조상우

전설의 마구(魔球) 현실이 되다

1970~80년대를 주름잡았던 스포츠 만화 주인공 ‘독고탁’과 ‘설까치’는 마구(魔球)를 던졌다. 독고탁은 S자로 휘는 ‘드라이브볼’, 먼지를 일으키는 ‘더스트볼’, 땅에 닿지 않는 ‘바운드볼’이 주무기였다. 설까치는 시속 170km 이상 강속구를 뿌렸다. 마구를 던지는 투수는 컴퓨터나 비디오 야구 게임에도 등장한다. 마구가 만화나 게임에 주로 나오다 보니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마구의 뜻(야구에서 상대편을 현혹하는 투수의 공)대로라면 마구는 분명 존재한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마무리 조던 힉스(Jordan Hicks). © 조선DB
1912년 한국 야구계에 등장한 ‘마구’

한국 야구에 ‘마구’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2년. 《한국야구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12년 7월 방학을 틈타 동경 유학생팀이 제2차 모국 방문 경기를 펼쳤다. 전번에 중견수로 뛰었던 유용탁은 이번에는 팀의 에이스로 변신, 커브를 능숙하게 던져 관중 사이에 ‘마구의 왕자’라는 소문이 났고 포수 변봉현과 유격수 이규정도 경쾌 무비의 플레이로 관중들의 찬사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한때 마구가 커브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커브는 직구처럼 오다가 홈플레이트 앞에서 뚝 떨어지는 변화구다. ‘베이스볼(baseball)’을 ‘야구(野球)’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진 일본 교육가 츄만 카나에(中馬庚)는 1897년에 펴낸 일반인을 위한 야구 해설서 《야구》에서 커브를 마구라고 불렀다.

1910년대에는 ‘커브’를 ‘마구’로 불렀다. 국내 최고 커브 달인으로 꼽히는 고(故) 최동원. © 조선DB
변화구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구종인 커브는 그동안 숱한 고수들을 배출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커브 달인으로 지금까지도 최동원이 꼽힌다. 최동원은 1984년 223개의 삼진을 잡아내 한국프로야구(KBO) 역대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갖고 있는데, 커브가 주무기였다.


마구를 꿈꾸며 새 구질 개발하는 이유

너클볼의 일반적인 그립. 엄지와 새끼손가락으로 공을 잡고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 공을 밀어낸다. © 조선DB
107년 전 마구로 불린 ‘커브’는 현재 프로 투수라면 거의 대부분 던지는 흔한 ‘구종’이 됐다. 투수들이 ‘마구’를 꿈꾸며 새 구질을 개발하는 이유다.

‘예측의 어려움’이라는 마구의 속성에 가장 가까운 공은 너클볼(knuckleball)이다. 원래 손가락 끝 관절(knuckle) 부분으로 공을 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공에 회전을 거의 걸지 않고 밀어내듯 던진다. 공 주위의 공기 흐름이 불안정해져 타자 근처에서 공이 어느 쪽으로 휠지 투수조차 알지 못한다. 속도가 시속 80㎞ 안팎으로 무척 느린데도 타자가 공을 때리기 어렵고, 타구도 멀리 뻗지 못한다.

1906년 에디 시코티가 처음 구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너클스’라는 별명을 가진 시코티는 33세이던 1917년 너클볼을 완성해 그해 다승-평균자책점-이닝에서 리그 1위에 올랐다. 1919년에는 생애 최다인 29승을 올리는 등 통산 209승을 기록했다.


너클볼 투수가 거의 없는 까닭

이런 엄청난 볼을 던지는 투수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간단하다. 던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깨 힘에 의존하지 않고 공을 밀듯 던지는 만큼 컨트롤하기가 힘든 데다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 장타로 연결될 확률이 크다. 부상 등으로 더 이상 빠른 공을 던질 수 없게 된 투수들이 마지막 방법으로 너클볼을 선택하지만 대부분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우리나라에서는 실제 경기에서 너클볼을 던진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 예전에 ‘불사조’ 박철순이 너클볼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은 팜볼(palmball)이었다. 1940년대 후반에 나온 팜볼은 말 그대로 공을 손바닥에 꽉 붙이고 직구 동작으로 던진다. 너클볼처럼 회전이 없고 직구보다 느린 체인지업 계열이다.


마구 수준의 ‘류현진 체인지업’

LA 다저스의 류현진이 던지는 체인지업은 ‘마구’ 수준이란 평가를 받는다. © 조선DB
체인지업도 직구처럼 날아들다 떨어지는 변화구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구종이다. 속도에 변화를 줘 타자를 속인다. 체인지업의 최고수는 류현진(LA 다저스)이다. 류현진의 체인지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올 시즌 부상에서 회복한 류현진이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승승장구하는 것도 체인지업 덕분이다. 키움 히어로즈의 서건창 선수는 “공이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너클볼, 팜볼, 프리스비 슬라이더(원반처럼 왼쪽으로 크게 휘어져 나가는 변화구) 등이 마구의 속성에 가까운 구종으로 꼽힌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마구는 강속구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도 빠른 구속이 눈에 띄어 메이저리그로 진출할 수 있었다.


‘강속구 지존’ 조던 힉스

최근 메이저리그에 ‘강속구 지존’이 등장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마무리 조던 힉스(Jordan Hicks)가 그 주인공. 2015년 드래프트 3라운드 출신으로 지난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힉스는 올 시즌 붙박이 마무리로 나서며 존재감을 한층 드러내고 있다. 힉스의 주무기는 100마일을 웃도는 싱커다. 변화구가 160㎞라니 말 다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빛과 소리에 반응하기까지 0.1초에서 0.3초가 걸린다. 투수판에서 홈플레이트까지는 18.44m. 투수가 던진 시속 150㎞의 강속구는 약 0.3초 만에 홈플레이트를 통과한다. 쉽게 말해 0.1초간 보고, 0.1초간 판단하고, 0.1초간 타격을 통해 안타와 홈런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160㎞의 강속구는 약 0.2초 만에 홈플레이트를 통과하는 만큼 타자들이 판단할 수 있는 0.1초간의 시간이 없다. 상식, 산술적으로 160㎞의 강속구는 칠 수 없는 공이다.

힉스의 올 시즌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00.5마일(161.7㎞)로 메이저리그 투수 중 유일하게 100마일을 넘었다. 힉스는 데뷔 시즌인 지난해에도 최고 시속 105마일(169㎞)을 넘겼다. 강속구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힉스와 맞붙어 삼진을 당한 강정호(피츠버그 파이어리츠)는 “공이 진짜 좋더라”고 했다. 강정호는 강속구에 강한 타자다.


한국엔 키움 히어로즈의 조상우

미국 메이저리그에 힉스가 있다면 KBO에는 조상우(키움 히어로즈)가 있다. © 조선DB
미국 메이저리그에 힉스가 있다면 KBO에는 조상우(키움 히어로즈)가 있다. KBO 공식 기록 업체인 스포츠투아이에 따르면 조상우의 올 시즌 평균 구속은 149.6㎞다. 공 10개를 던지면 그중 7개가 150㎞를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조상우는 지난 4월 13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9회 초 정은원을 상대로 올 시즌 가장 빠른 156.9㎞의 공을 던졌다.

불같은 강속구로 타자를 삼진아웃시키는 투수에 구단과 팬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이 던지는 볼을 ‘마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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