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ORTRAITS

시인 박준

그 숲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글 : 염은영 에디터  / 사진 : 정치호 작가

박준의 시를 읽을 때면, 기원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어디에서 촉발됐는지 결코 알 수 없지만, 끝내 그 사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감정.
그것은 가슴에 처연(凄然)히 스미는 일을 환영하고, 기억의 시간이 힘겨워지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도록 돕는다.
이는 시로부터 마음의 능력을 키우는 일.
곧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고,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한다.
그 덕분에 봄이, 그해의 봄과 오늘의 봄이 성큼 다가오고야 말 것이다.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가 출간된 지 두 달여가 지났습니다.
6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신 마음이 어떤지 묻고 싶어요.


시집을 주목해주셔서 큰 감사를 느껴요. 다만, 그건 시집 자체에 대한 주목인데, 그와는 별개로 개개의 시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멀리까지 가야 할 텐데… 그런 고민이 남아요. 그리고 책을 내고 나면, 그저 제 입장에서는 세상에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들고 말아요.

부끄럽고 부담스러워서 시집을 보고 싶어지지 않는 그런 마음이.


두 번째 시집은 첫 번째 시집이 나온 2012년에 계약하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번 시집의 시들은 그 후 6년 동안 쓴 것들인가요?


이번 시집 대부분의 시는 4년 동안 쓰고, 2년을 묵힌 것 같아요. 묵히는 것은 퇴고의 과정을 의미하는데, 제가 하는 퇴고라는 게 조금 웃겨요. 저의 퇴고는요, 시를 벽 보듯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바라보는 거예요. 마치 시간제한 없는 어르신 바둑처럼요. 그러다가 놔요, 한 글자를. 그리고 또 한참을 보다가 물러요. 네 시간이든 이틀에 걸쳐 들인 열 시간이든, 한참을 끙끙 앓은 것의 결과물은 처음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같거나 겨우 한두 글자가 달라지는 것이에요. 생산적인 측면으로 보면 정말 쓸데없어요. 그런데 그 시간이 없으면 안 돼요.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요. 이 시간은 스스로를 용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2년이나 걸린 것일 테고요.


조급한 마음은 안 드셨어요?

첫 시집은 굉장히 조급해했거든요. 돌아가신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주연한 영화 중에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가 있는데, 그때 제가 그랬어요. ‘뭔가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무척 컸어요.

다행히 이번엔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내년에 낼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급한 마음과는 달리 첫 시집 출간은 되레 늦어졌죠.
시집의 발문을 쓰신 고(故) 허수경 시인의 제안이라고 알려져 있고요.
어떻게 그분의 제안을 따르셨어요? 불만이나 두려움은 없으셨어요?


불만이… 완전 가득했죠.(좌중 폭소) 말도 안 돼, 했어요. 그렇잖아요. 시집의 발문을 부탁한다는 건 출간을 한두 달 앞두고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 얘길 출간이 임박한 때에 들었으니….

게다가 선생님께서 발문을 다 쓰기까지 하신 상태였고요. 살면서 듣기 싫은 말들이 있는데, 대개는 두 종류예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내뱉는 무용한 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유익한 말. 보통 후자는 들어야 하죠. 너무 괴롭고 싫지만 경험적으로 체득해서 아는 거예요. ‘양치질해라!’ 이 듣기 싫은 말 말이에요.(웃음) 허수경 선생님은 1990년대부터 독일에 계셨으니까, 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분이 그런 말을 하신 거였죠. 마음의 반발이 컸는데, 본능적으로 그 말씀을 따라야 할 것 같았어요.

반대로 생각하면 이 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후배에게 이 말씀을 하신 거니까요. 그렇게 1년을 묵혔어요.

그 시간 동안 시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는데요, 시에 대한 제 열기를 잠재우는 데 그 시간이 정말 필요했다는 생각을 해요. 그때만 해도 시에 대한 생각이 너무 뜨거웠고,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는 마음도 앞섰고요. 시에 대한 부차적인 욕망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이번 시집의 제목도 쉽게 정해졌나요?

제가 쓴 시의 제목이나 문장이 곧 제목의 후보가 되는데, 시 제목은 한 단어로 된 명사형의 제목이 많아서 대개 제외 대상이 돼요. 첫 시집과 산문집을 통해 제목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이미 배운 바가 있기 때문인데요.(웃음) 그래서 이번 시집 제목을 어렵지 않게 정했고, 후에 조언을 구하고 확정했어요.


두 번째 시집의 전반적인 정서 또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을 보면, 분명한 변화도 느껴져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에는 ‘었’과 ‘겠’이라는 시간 선어말 어미의 쓰임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가 그리움의 뉘앙스를 달리 준다고 해야 할까요.


이번 제목은 고백 같은 거였어요. ‘보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상대방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요. 상대방의 의사도 모르는 채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건 실례잖아요. 그것을 완곡하게 전달하고자 가정형으로 썼어요. 제가 좋아하는 의사 전달 방식이기도 하고, 평소 쓰는 말투이기도 해요. 캠페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는 우리가 조금 더 돌려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정보를 주고받는 피상적인 대화에서야 직접적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말하는 게 좋지만, 감정이 오고 가는 대화에서는 덜 그랬으면 좋겠어요.



에둘러 말하는 것에 미덕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것 같아요. 관계가 친밀할수록 정서를 주고받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말들을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데서 일종의 폭력이 개입되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선택을 강요하는 말이 비일비재하게 쓰이죠.

돌려 말하는 게 답답하게 느껴질 수는 있는데, 그것이 곧 상대방에게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 되니까 좋은 것 같아요. 그 반응으로 말한 사람도 상대방의 의사를 명쾌하게 알 수 있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하면요,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면 ‘장마 싫어!’ 그럴 테고요, 장마를 싫어하지만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장마 별론데, 그래도 한번 볼까’ 하는 거예요.(웃음)


첫 시집의 제목이 될 뻔했던 ‘미인’은 끝내 시인께서 쓰게 되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번 시집에서는 미인들이 얼마나 더 늘거나 줄었을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미인은 추가되는 것 같아요. 첫 시집에서는 여덟 명이었어요. ‘6+2’였는데, 나머지 두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강이어서요. 아시다시피 ‘미인’이라는 말이 특정 성을 칭하는 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존재를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어떤 좋은 하나의 생각이든지요.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미인으로 삼고 그에 대해 시를 써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들이 추가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은, 그러니까 제가 무언가를 미인이라고 쓰는 것은 그것이 떠났기 때문이에요. 아름다운 존재가 떠났을 때 미인이라고 말하면서 기억하는 것인데, 그러니 미인이 늘어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에요. “젊은 시인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면서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허수경 선생님도 미인이 되셨고요.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시로 축적하는 걸까요?

모든 기억을 시로 쓸 수는 없고요. 기억이 시를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쓸 수 없는 기억도 있어요. 기억과 내가 어느 정도 화해를 해야 시로 쓸 수 있는데, 그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리죠. 그래도 언젠가 쓸 수 있다면 좋은 거예요. 쓰면, 끝내 쓰면 장례를 잘 치른 기분이에요. 잘 떠나보낸 것 같아요. 그런 일이 제게 시가 되는 것 같고요.


연작시라고 해야 할까요? 〈세상 끝 등대〉는 이번 시집에도 이어집니다.
연안의 풍광과 더불어 가장 진하게 내려앉는 감정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멋 부린 제목이 알려주듯이, 〈세상 끝 등대〉는 제가 생각하는 시인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시를 쓰는 원동력이 그리움인데, 그것이 실질적인 그리움도 있지만 형체가 없는 그리움도 있거든요. 제가 뭘 그리워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어요. 그래서 다행이자 불행인 게, 그 그리움의 정체를 모르기에 시 앞으로 향하게 되는 것 같아요.


농담처럼 “다음 시집은 7년 후에 낼 것”이라고 하셨는데요.(웃음)

미래를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까마득해요. ‘7년’이라는 시간은 그저 먼 시간의 다른 이름이에요.(웃음) 무엇을 쓰려면 경험이 필요하고, 또 현재 시점으로 도착한 기억이 있어야 하는데, 당장은 무엇을 써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래서 ‘다음 시집을 어떻게 낼까’라는 물음은 너무 막막하게 다가와요. 그나마 그에 비해 조금 덜 막막해지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물음이에요. 잘 살면, 선하게 살면, 그 삶이 선행되면 그때 쓸 수 있는 것이 있겠지, 라는 미약한 믿음이 있어요.


경험에 의한 믿음이겠죠?

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어떤 시를 쓰느냐를 크게 좌우하는 것은 분명해요. 그래서 앞으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지금으로서는 그 일이 제게 가장 중요합니다.

박준
2008년 실천문학에 〈모래내 그림자극〉이 당선되어 데뷔했다. 2012년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출간했고, 이듬해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2016년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 기드온 루빈의 〈무제〉라는 그림을 입고 출간돼 화제를 모았다. 6년 만에 발표하는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초판 3만 부를 찍었고, 한국 서정시의 본령을 되새기는 데 그 독보성을 증명했다. 그의 시집은 모두 계절의 순서에 따라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해 시인은 “기억나지 않는 대부분의 날들을 작은 일이라고 한다면, 결국 가장 큰 일은 계절이 바뀌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 순서대로 작은 일들을 편제하는 일이 시집을 이루는 데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염은영은 책과 영화의 이야기를 글로 매만지던 사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에디터였다.
따듯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기꺼워한다.

정치호는 기자 출신의 사진작가이자 디자인 그룹 엇모스트의 대표다.
사람들의 진심 어린 ‘민낯’을 꾸준히 카메라에 담고 있다.
  • 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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