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주가 만난 미술가

화가 박민준

영원히 기억될 그림 한 장을 위해…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박민준
1971년 서울 출생. 홍익대 미술대학과 미술대학원 회화과 졸업.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재료기법학과 연구생과정 수료. 뉴욕 가나아트갤러리 전시회 및 서울 갤러리현대, 두가헌갤러리 등에서 여덟 차례 개인전. 서울과 베이징, 도쿄, 뉴욕 등에서 단체전 참여.
“그림을 그리다 ‘어디에서 전시하면 주목받을까?’ ‘이 그림은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같은 잡생각이 들면 붓을 집어던졌어요.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다 아무 생각이 없어졌을 때 다시 그리기 시작했죠. 그림 그리기가 균형감각을 잃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줄타기와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박민준 작가는 ‘라포르 서커스’라는 가상의 서커스단 이야기로 11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줄타기에 대한 관심이 서커스단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그는 개인전과 함께 《라포르 서커스》라는 같은 이름의 장편소설도 발표했다. 《라포르 서커스》에는 줄타기를 하는 쌍둥이 형제 라포와 라푸, 단검 던지기 묘기를 벌이는 아이카,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한 인형 엘카드몬을 만든 인형술사 아트만, 마술사 엘린과 동물조련사 엘레나 등이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읽을 수 있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서커스단의 모습이 펼쳐진다.

박민준 작가의 그림을 마주하면 우선 놀라운 기교에 깜짝 놀라게 된다. 미묘한 표정까지 포착해내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 때문에 실제 눈앞에 있는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자세히 보면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이다. 코끼리와 호랑이의 몸은 하얗게 탈색된 후 색색의 문양이 그려져 있고, 침팬지가 왕관을 쓰고 마차에 앉아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동물이나 탈의 표정도 너무 풍부하고 생생해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을 조금 크거나 작게 그려 어긋난 비례로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장면을 실제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과 비슷하다. 작가는 “실제 장면을 묘사한 것 같은 그림에 이질적인 요소를 적절히 가미하면 긴장감과 흥미가 유발됩니다. 사실과 너무 동떨어지면 그런 느낌이 줄어들기 때문에 치밀하게 계산하고 여러 번 수정해서 그렸죠”라고 설명한다.


그림 속 이야기, 소설로

Parade for Rapo(라포를 위한 행진) _ Oil on canvas, 210x294cm, 2016-2017
작가는 그동안 삶과 죽음, 영원이라는 묵직한 주제에 관해 물음을 던지는 그림을 그려왔다. 이번에 발표한 소설과 그림도 그리스 비극처럼 비장미를 풍긴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처절한 운명에 의해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었거나 버림을 받았다.

쌍둥이 형제 라포와 라푸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태어난 후 태풍과 홍수, 가뭄 등 자연의 혹독한 시련이 이어지면서 마을이 황폐해진다. 어머니가 영양부족으로 사망하고 아버지도 눈보라 치는 밤거리에서 쌍둥이 형제를 품에 안은 채 숨을 거둔다. 싸늘하게 식은 아버지 품 안에서 살아남은 형제를 서커스단 단장이 발견하고 데려와 키운다. 형 라포는 서커스단 최고의 줄타기 곡예사가 되고, 동생 라푸는 형의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된다. 하지만 관중의 갈채를 받던 라포가 줄에서 추락해 사망하고, 라푸가 형 대신 줄 위에 선다.

어린 시절 유랑 서커스단의 칼 던지기 묘기를 보고 매료된 아이카.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연습을 거듭하던 그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허수아비 대신 표적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아슬아슬하게 친구의 몸을 피해 단검을 던질 자신이 있었다. 자만심의 대가는 참혹했다. 단검은 친구의 가슴을 찔렀고, 아이카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고통과 직면하기 위해 서커스단에서 단검 던지기를 하고, 정신을 더욱더 예민하고 날카롭게 벼린다. 아트만이 최고의 인형을 만들려고 정성을 다할 때 그의 생명 조각이 조금씩 인형에 섞여 들어간다.

소설 《라포르 서커스》의 등장인물을 보면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갈아 넣는 예술가의 초상이 떠오른다. 그것만이 비극적인 운명과 죽음을 극복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처럼 보인다. 소설 속 아트만은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이 세상에 아직 순수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겠다’고 마음먹고 인간의 원형과도 같은 순백색의 인형 ‘엘카드몬’을 만든다.

Panteon(Pantheon·판테온) _ Oil on canvas, 210x291cm, 2016-2017
전시장에는 박민준 작가가 그린 ‘엘카드몬’이 걸려 있다.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미간을 찌푸린 목각인형 엘카드몬을 보면서 삶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가는 “이 그림과 미켈란젤로의 드로잉 〈피에타〉의 구도가 똑같다”고 설명한다.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자리에 엘카드몬을 배치했다. 인간의 고뇌를 대신 짊어진 예수를 엘카드몬으로 바꾸어놓은 게 의미심장하다.

르네상스 시대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또 있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을 차용한 〈죽음의 탄생〉이다. 〈죽음의 탄생〉에 등장하는 비너스는 창백한 얼굴로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켄타우로스처럼 상체는 인간, 하체는 말인 반인반수(半人半獸)가 비너스에게 해골을 보여주면서 죽음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밀하고 매끈한 붓질과 균형 잡힌 구도, 치밀한 묘사, 온갖 은유로 가득한 그림. 박민준 작가는 현대미술이 등장하기 이전 서양 고전회화의 전통을 되살린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은 새롭다. 자신만의 이야기, 은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홍익대 회화과에 다니던 시절, 그는 주관을 배제하고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하이퍼리얼리즘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 학생들이 추상화를 그릴 때 사실주의 회화를 고집하면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사실주의는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러다 카라바조의 작품 〈의심하는 도마〉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도마가 부활한 예수의 못 자국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확인하는 장면으로, 성경 속 내용을 실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처럼 묘사한 작품이다. 그 작품을 보자 그때까지 자신이 그려왔던 그림들이 부질없이 느껴졌다고 한다. ‘이런 감동을 주는 그림 한 점이라도 남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Statue of Rapu(라푸의 상) _ Urethane resin, gold leaf, colored wood, 260x31x34cm, 2018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유럽 미술관 순례를 떠나 한 달 반 동안 아홉 나라를 돌았다. 그 후 한동안 거장들의 작품을 오마주한 그림을 그리던 그는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2007년에는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원에서 서양 고전회화의 재료와 기법을 공부했다.

“세 차례 개인전을 하면서 젊은 나이에 인정받는다고 느꼈지만, 동양인으로서 서양 회화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따라한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에 가서 도제식 교육을 받을까’ 생각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겠더라고요. 비슷한 교육을 하는 곳을 찾아 일본으로 갔죠.”

일본에서 1년 동안 공부한 후 현대미술의 중심인 뉴욕으로 건너갔다.

“2015년까지 7년 동안 뉴욕에서 지냈습니다. 수많은 작가가 모여 있는 그곳에서 제 위치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죠. 나를 찾아 방황하다 방향을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이제 돌아가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제주도에 자리를 잡았죠.”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라포르 서커스’ 작업에 몰두했다. 가로세로 2m가 넘는 큰 그림 한 점을 그리는 데 반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채는 은유부터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은유까지 여러 층위의 은유가 담겨있다. 알쏭달쏭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자꾸 작품 의도가 무엇인지 물었고, 일일이 대답해주기 피곤해진 그는 소설로 써서 보여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동화나 단편으로 쓰려고 했지만, 쓰다 보니 점점 길어졌다고 한다.


삶과 죽음, 영원을 뻔하지 않게

Rapu-Missing Bluebird(라푸-파랑새를 잃어버린 광대) _ Oil on canvas, 45x35cm, 2018
이번 전시에서 그는 새로운 양식의 작품들도 선보였다. 소설 주인공 라푸의 작품이라고 가정하면서 거침없는 붓질로 그려낸 그림들이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묘사했던 이전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면서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처음으로 조각 작품들도 선보였다.

“‘이건 내가 아니라 라푸가 그리는 그림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부담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붓질을 했습니다. 쌍둥이 형제를 품에 안고 죽어가는 아버지를 그릴 때는 울컥했습니다. 내가 만든 이야기에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다니,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서 지금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제 작품도 달라질 것 같아요.”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 영원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이야기해온 작가는 소설에서 아트만의 입을 빌려 자신의 예술관을 펼친다. 순수한 예술적 열망이 낳은 완전체,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존재를 만들고 싶었던 아트만처럼 그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그림 한 장을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해야죠”라고 덧붙인다.
  •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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