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주가 만난 미술가

조각가 정욱장

궁극에 이르려는 인간의 열망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정욱장
1960년 경남 사천 출생. 1989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 1991년 서울대 대학원 조소전공 졸업. 현재 울산대 예술대학 조소과 교수. 1991년 부산야외조각대전 대상, 1992년 서울현대조각공모전 대상. 2018년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 선정. 미국 라스베이거스 크리스탈스, 홍콩 하버시티, 서울예술재단, 김종영미술관 등에서 18차례 개인전, 빈 컨템포러리, 바젤 볼타쇼, 상하이 아트페어, 아트 쾰른, 홍콩 아시아탑갤러리 호텔아트페어 등 국제 아트페어 참가.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 걸까? 조각가 정욱장의 작품 〈긴 여정〉을 보고 있으면 근원적인 상념에 잠기게 된다. 비현실적으로 긴 다리를 가진 말을 형상화한 작품인데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다. 김종영미술관의 ‘2018년 오늘의 작가’로 선정된 정욱장 작가를 김종영미술관에서 만났다. 그에게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진 동물을 보고 있으니 이상을 좇느라 현실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떠오른다”고 했더니 “제 작품이 그렇게 비칠 수도 있지만, 너무 우울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강조한다.

“동물 형상에 나뭇가지 모양의 다리를 붙이니 제가 전달하고 싶은 의미가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나무는 계속해서 성장하잖아요? 길어지는 다리를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면서 점점 더 높이 더 멀리 바라보려는 인간의 열망, 이상을 좇으려는 의지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자기 부정이라기보다는 자기 긍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말 형상의 조각 옆에는 알을 떠올리게 하는 둥그런 형상들이 놓여 있다. 포유류인 말은 알에서 태어나지 않지만, 알은 생명이나 역사의 시작, 원초적인 상태를 생각하게 한다. 신화에서는 알에서 태어나는 인물들이 종종 등장하지 않는가.

“먼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을 초월해 궁극의 가치, 본질, 원형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채우고 덧붙이는 게 아니라 비우고 비워서 공(空)에 이르는 과정이지요. 양자물리학도 우주를 공(空)으로 설명하잖아요? 그동안 다양한 작업을 해왔지만, 제 작품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핵심은 ‘비워내기’라고 생각합니다.”

스테인리스스틸이라는 재료로 조각 작품을 만든 이유도 거울이나 물처럼 주변 풍경을 비추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물이 가장 도(道)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물은 어떤 모양의 그릇도 그 모양대로 채우지 않나요? 자신의 모양을 주장하면서 나를 따르라고 고집하지 않죠. 물은 항상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서 낮은 곳으로만 흐릅니다. 형상을 가진 덩어리이긴 하지만 스테인리스스틸 조각도 자신을 비워서 주변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지요.”


삼천포 자연이 준 선물

A long journey-A golden horse II(긴 여정-황금 말II), 25x15X46(h)cm, Gold plating on stainless steel, 2018
작가들을 만나다 보면 저마다 내면 깊숙이 감춰두고 있던 원초적인 감정을 끄집어내서 작업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원초적인 감정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경우가 많다. 나뭇가지처럼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지고 높고 멀리 바라보려는 동물의 형상은 작가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잡다하고 비본질적인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궁극에 이르려는 작가의 의지는 어디에서부터 형성된 것일까? 작가는 사천시(옛 삼천포) 바닷가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중학생 때까지 삼천포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부산으로 이사하시면서 삼 형제 중 둘째인 저만 할머니 댁에 남겨두고 가셨어요. 지금 생각하니 그때 제가 정서장애였던 것 같아요. 항상 우울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아무 데나 들이박고 친구들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연과의 교감에서 희열을 느꼈습니다. 녹색 보리밭 너머로 펼쳐지는 연푸른 바다, 검푸른 밤바다에 일렁이는 달빛을 바라보거나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면서 달릴 때 묘한 감정이 차올랐어요. 눈물이 흐르기도 했죠. 너무 아름다워 희열을 느끼면서 슬프기도 했습니다.”

수평선을 한없이 바라보며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상념에 잠기던 소년은 초월을 이야기하는 조각가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과 초월성을 깊이 느낀 게 아닐까? 그 아름다움에 비하면 현실의 잡다한 욕망은 하잘것없이 느껴졌기에 비우고 비워 본질에 이르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 때문인지 그의 작품에서 현실을 넘어서려는 의지, 숭고함이 느껴진다. 그는 부산공예고등학교(한국조형예술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면서 삼천포에서 부산으로 왔다.

A long journey-A golden camel II(긴 여정-낙타), Parts III, stainless steel, 2012
“어릴 때부터 광에 틀어박혀 부서진 교자상 같은 것들로 뚝딱뚝딱 뭔가를 만들곤 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학비가 공짜더라’면서 부산공예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주셨습니다. 제대로 미술수업을 받아본 적도 없지만, 실기시험을 보고 합격했어요. 그 학교에 입학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선생님들한테 조각을 배웠는데, 너무 재미있고 신이 나서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작업했습니다. 주말에도 도시락 3개를 싸 들고 학교에 갔으니까요.”

고등학교 졸업 후 조각 회사에 취직해 벽면 부조와 초상조각을 만들던 그는 ‘더 배우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고,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으로 공부에 몰두했고, 서울대 조소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대학 시절에도 그는 독서실 야간지킴이와 미술지도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해결했고, 대학원에 진학해 ‘초월 의지를 바탕으로 한 조각 작품 제작연구’를 주제로 작업하면서 석사 논문을 썼다. 그는 대학원 시절 최종태 교수의 선문답 같은 가르침을 통해 얻은 게 많았다고 했다.

“선생님은 이래라저래라 가르치지 않고 화두만 던지셨어요. 자신을 넘어서고 미술사를 넘어서고 자연을 넘어서라고 하셨죠. 그게 제 일생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A long journey-Camels(긴 여정-낙타), 600x400x485(h)cm, Stainless steel, 2014
그는 1994년 부산으로 내려간 후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 2001년 울산대 교수가 된 후에는 한동안 서울에서 전시도 거의 하지 않았다.

“원래 경쟁을 좋아하지 않아서 서울이라는 환경이 불편했습니다. 서울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이나 미술계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면을 성찰하면서 나만의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죠. 가장 나다운 작업을 발견했을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낍니다. 철망으로 가볍고 비어있는 조각을 만들거나 알루미늄이나 돌을 깎아내 미니멀한 작품을 만들면서 ‘비워내는 작업’을 주로 했어요. 다리가 긴 동물의 형상도 그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동물 형상이지만 제가 살아온 날들이 투영된 작품이지요.”

그는 말뿐 아니라 다리가 긴 낙타, 코끼리, 사슴, 북극곰 등의 형상도 만들었다. 말이나 낙타, 코끼리는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르면서 인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온 동물들이다. 하지만 이제 효용 가치가 줄어들면서 점점 사라져가는 그 동물들의 형상을 금으로 도금한 작품도 있다.

A long journey-Elephants(긴 여정-코끼리), Parts II, Stainless steel, 2013
“어릴 적에는 꼴을 베어 소에게 먹이면서 매일같이 동물과 교감했습니다. 자연과 내가 하나라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지요. 그래서 인간 중심 사회에서 효용 가치를 잃고 사라져가는 동물들에 동질감을 느끼나 봐요. 금으로 도금해 그들의 영화로웠던 시간을 상징하고 싶었습니다. 저무는 해인 석양이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슬프잖아요?”

서울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작품은 이제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미국, 독일에서 개인전을 했고, 중국의 상하이 아트페어, 오스트리아의 빈 컨템포러리, 스위스의 바젤 볼타쇼 등 국제 아트페어에도 참가했다. 지난해 빈 컨템포러리에 참가했을 때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여러 나라 언론이 그의 작품에 주목했고, 올해도 반응이 좋았다. 작품도 많이 판매되었다. 하지만 비우고 비우면서 영원을 향해 나아가려는 그의 지향점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덕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온갖 것 무성하게 뻗어가나 결국 모두 그 뿌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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