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을 바꿀 영화 〈13〉 〈글래디에이터〉

영웅이 필요한 때

중국 명나라 말기 홍응명(洪應明)이 인생의 지혜를 모아 펴낸 채근담(菜根譚)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작은 일에도 빈틈이 없고, 어둠 속에서도 속이거나 숨기지 않고, 실패해도 자포자기하지 않으면, 그는 바로 참된 영웅이다.”

이 문장에서의 영웅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웅이라기보다는 노력과 자질 여하에 따라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뜻에서의 그것일 것이다.

하지만 영웅이 필요한 때가 있다. 그리고 영웅은 전쟁처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주홍글씨》(1850)의 미국 작가 너새니얼 호손도 “영웅적 세상을 만나지 못하는 한 영웅은 영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 (Gladiator, 2000)는 바로 그런 영웅의 이야기다. 배경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던 ‘5현제(五賢帝) 시대’의 막바지인 서기 180년. 장군에서 검투사로 전락한 주인공의 인생역정을 로마사의 실제 인물들 속에 용해시켜 웅장한 스케일로 그려낸 시대극이다.

1억 1000만 달러를 투입한 블록버스터 영화로 로마시대를 완벽히 재현하기 위해 2년에 걸쳐 이탈리아, 몰타, 모로코, 영국 등 4개국에서 촬영하였으며, 막대한 제작비와 향상된 CG 기술을 바탕으로 웅장한 볼거리들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글래디에이터〉는 전 세계에서 4억 570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해 서울 132만, 전국 266만 관객을 기록했다. 〈글래디에이터〉 이후에 나온 로마 배경의 드라마나 영화들은 일정 정도 이 영화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검투사 막시무스의 탄생


영화 오프닝에서 게르마니아에 주둔한 북부군 군단장 막시무스(러셀 크로)는 게르만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막시무스는 전쟁이 끝난 뒤 고향 집에 돌아가 가족과 농사를 짓는 소박한 삶을 바라지만, 전선 시찰에 나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리처드 해리스)는 용맹성과 덕망을 겸비한 막시무스가 자신의 권력을 물려받아 로마의 수호자가 되어, 로마의 체제를 다시 공화정으로 되돌려주기를 부탁한다.

이를 알아차린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호아킨 피닉스)는 자신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으려는 아버지에게 분노하여 충동적으로 아버지를 자기 품에서 질식시켜 살해하고 만다.

코모두스는 아버지가 자연사했다고 속이며 막시무스에게 충성을 요구하나 막시무스는 황제의 피살을 눈치채고 충성서약을 거부한다. 황제의 근위대에 잡혀 처형당할 위기에 몰린 막시무스는 극적으로 탈출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에서 불에 탄 아들과 아내의 시체를 목격한다. 코모두스가 막시무스의 가족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아내와 아들의 시신을 땅에 묻고 탈진해 정신을 잃은 막시무스는 한 노예 상인에 의해 발견된다. 노예 상인은 그를 프록시모(올리버 리드)에게 팔아넘긴다. 검투사 출신인 프록시모는 노예들을 검투사로 훈련시키고 이들을 시합에 내보내 돈을 버는 사람이다. 이런 프록시모에게 팔려간 막시무스는 검투사가 된다.


가족을 잃은 막시무스는 무력하게 검투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떠밀리듯 겪는다. 칼을 들고 싸우는 검투사와 방패를 들고 싸울 검투사를 정하는 테스트에서 칼을 버리고 계속 얻어맞기만 하는 식이다.

하지만 막시무스가 범상치 않음을 간파한 프록시모는 첫 번째 검투사 시합을 앞두고 “경기에 들어가면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관중의 환호에 떠밀려 싸우게 될 것”이라 말하고, 그의 예상대로 막시무스는 시합에서 상대편을 모두 쓰러뜨리게 된다.

로마 장군 시절에 막시무스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엄청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장군임에도 직접 전투의 최전선에서 몸을 던지며 싸운 까닭에 부하들에게도 큰 존경과 지지를 받은 인물이다.

막시무스는 숱한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검투사 시합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검투사 ‘스페냐드’로 불리게 된다. 본인이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스페인 사람’으로 통칭된 것이다.


전투 장면 위해 실제 산 불태워


영화 초반부의 게르만족과 로마 군단의 전투 신과 검투사들의 박진감 넘치는 결투 신은 이 작품의 백미로 꼽힌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을 그대로 복원했으며, 도입부 10여 분 동안의 전투 장면에서는 실제로 영국의 산 하나를 모두 불태워 촬영했다.

러셀 크로는 할리우드에서 30년 만에 만들어진 대규모 로마시대극 출연을 앞두고 실감 나는 검투사 연기를 위해 약 20킬로그램의 체중을 감량하며 근육 트레이닝을 했다고 한다.

승리를 거듭하면서 영웅이 된 스페냐드는 마침내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검투 시합에 참가하게 된다. 콜로세움에서의 첫 시합에서 막시무스와 그의 동료 검투사들은 전차를 타고 나타난 병사들을 무찔러 관중으로부터 엄청난 환호를 받는다.

코모두스는 승리를 거둔 검투사 스페냐드를 만나기 위해 경기장으로 내려온다. 막시무스는 부러진 창날을 몰래 주워 코모두스를 찌르려 하지만 코모두스의 어린 조카 루시우스가 코모두스 곁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행을 미룬다.

코모두스는 막시무스에게 투구를 벗고 이름을 밝히라고 요구하지만 막시무스는 자신의 이름은 검투사라고 답하고 등을 돌려버린다. 코모두스는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무례를 저지른 막시무스에게 재차 얼굴과 이름을 밝히라고 명령하고, 이에 막시무스는 투구를 벗고 자신을 밝힌다.

당황한 코모두스는 막시무스를 죽이려 하나 경기장의 관중이 “살려라”라고 외쳐대자 어쩔 수 없이 포기한다. 황제에게 굴욕감을 안긴 막시무스와 동료들은 노예 검투사들의 환호 속에 감옥으로 돌아간다. 수백 명의 검투사가 “막시무스!”를 외쳐대는 이 신은 음악을 맡은 한스 짐머 특유의 웅장한 선율과 어우러지면서 커다란 전율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코모두스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갖고 있다. 작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조각상을 칼로 흠집을 낸 직후에 그 조각상을 껴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에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애정을 받지 못한 슬픔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코모두스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러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된다. 코모두스가 로마로 개선할 당시 민중은 저게 무슨 황제냐고 대놓고 조롱하며, 원로원 의원들도 그가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지 걱정된다고 지적할 정도다. 또한 누이인 루실라(코니 닐슨)에 대한 애정은 단순한 가족애를 넘어서, 병리학적 집착 및 성적인 사랑으로 번지기도 한다.


골칫거리를 안게 된 코모두스는 막시무스를 제거하기 위해 불패의 검투사 타이그리스와 시합을 붙이지만 이번에도 막시무스가 승리한다. 황제는 바닥에 쓰러진 타이그리스를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막시무스는 그를 살려준다. 이 일로 막시무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비로운 막시무스’로 통하게 된다. 순식간에 대중을 휘어잡은 막시무스는 이제 황제조차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선다.

그 후 막시무스는 하인이었던 키케로를 만나 그가 지휘하던 군대가 여전히 그를 지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용기를 얻은 막시무스는 코모두스의 누이 루실라, 원로원의 그라쿠스와 공모해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낌새를 알아챈 코모두스가 루실라를 협박해 계획을 알아내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관련자들이 모두 죽고, 탈출을 시도하던 막시무스 역시 붙잡힌다.

막시무스를 사로잡은 코모두스는 콜로세움으로 끌고 와 결투를 벌여 그를 죽임으로써 로마 시민들 앞에서 당당한 승리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운다. 경기 직전 코모두스가 막시무스를 찾아와 도발하자 막시무스는 담담하게 말한다.

막시무스 : 예전에 이렇게 말한 한 남자를 알고 있소.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미소를 짓는다.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소로 답하는 것이다.”
코모두스 : 그럼 그 말을 한 너의 친구도 죽을 때 미소를 지었나?
막시무스 : 그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 죽인) 당신의 아버지였소.
코모두스 : 넌 내 아버지를 사랑했지. 하지만 나도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러니 우린 형제겠군. 그렇지? 나를 위해 미소를 지어보라, 형제여.


코모두스는 이 대사를 던지며 막시무스를 단검으로 찔러 큰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갑옷으로 상처를 가리게 한 뒤 결투를 벌인다. 수천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계속해서 피를 흘리는 막시무스는 몸을 추스르며 온 힘을 다하고, 마침내 코모두스의 목을 찔러 승리를 거둔다.

막시무스는 자신을 둘러싼 병사들 앞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공화정의 부활을 소망했었다는 것을 전한 뒤, 가족의 환상을 보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루실라는 선왕과 막시무스의 유지를 이어받기로 하고, 검투사들에게 자유를 준다.

해가 저물어가는 텅 빈 콜로세움 안에서 막시무스의 친구였던 흑인 검투사 주바가 그의 유품을 콜로세움 바닥에 묻으며 “죽어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읊조리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고증은 글쎄

〈글래디에이터〉 오프닝에서 막시무스가 밀밭에서 손으로 밀을 하나하나 훑으며 천천히 걷는 모습은 영화의 엔딩에서 다시 나온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신의 죽은 아내와 아들에게로 가는 환상 속에서 막시무스는 다시 밀을 훑으면서 천천히 걸어간다. 서구에서 밀밭은 천국, 이상향을 상징하는 장소라고 한다. 워낙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 신은 이후 다른 영화들에서 오마주로 사용되기도 했다.

〈글래디에이터〉는 탁월하게 연출된 전투 장면과 스펙터클한 전개 가운데에서도 스토리의 인간적인 면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매혹적이고 영웅적인 이야기를 깔끔하게 풀어낸 영화다. 러셀 크로는 말할 것도 없고 악역을 멋지게 소화한 호아킨 피닉스와 올리버 리드 등 배우들의 활약도 컸다.

프록시모 역의 올리버 리드가 촬영 도중에 심장마비로 숨지는 일이 발생하자, 2분여 남은 그의 연기 장면을 위하여 320만 달러를 들여 컴퓨터그래픽으로 그의 모습을 복원하여 촬영을 마치기도 했다.

하지만 고증은 그다지 충실하지 못하다는 게 중평이다. 스토리는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허구이며, 비주얼적으로도 실제 로마의 모습보다는 현대인의 로마에 대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글래디에이터〉는 2001년 제73회 아카데미상에서 12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의상, 음향, 시각효과상의 5개 부문을 거머쥐었다. 또 2001년 골든글로브상의 드라마 부문 최우수작품상, MTV영화상의 최우수영화상, 영국아카데미상의 작품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하며 흥행뿐만 아니라 비평 면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감독 리들리 스콧(1937~)은 〈에일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 〈델마와 루이스〉(1991) 같은 걸작을 만든 명장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블랙 호크 다운〉(2001), 〈아메리칸 갱스터〉(2007) 등 화제작을 끊임없이 내놓으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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