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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옛이야기의 역설

‘다시 만나는 옛이야기’ 시리즈 낸 구광본 소설가

사람들은 매일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를 소비하며 산다. 소설, 영화, 웹툰, 드라마의 등장인물들과 낯선 시공간을 거닐며 재미와 지혜를 얻는다. 신화나 전설이나 민담 같은 옛이야기는 어떨까. 구광본 소설가는 ‘다시 만나는 옛이야기’(전5권) 시리즈의 1~3권인 《해가 되어라 달이 되어라》,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복은 빌릴 수도 있지》를 연이어 펴냈다. 《미궁》, 《맘모스 편의점》 등의 소설집을 내며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가 정통 소설이 아닌 옛이야기 시리즈를 낸 계기가 궁금했다.

사진제공 : 구광본
“옛이야기는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폭넓은 사유와 깊은 감동이 있어요. 좌절과 분노라 하면 뭣하지만 그 비슷한 상태에 빠진 적이 있는데 〈호랑이를 세 번 만난 사람〉, 〈신기한 호랑이 눈썹〉 같은 이야기가 마음에 울림과 위안을 줬어요. 옛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지 10년 정도 된 듯합니다. 우리 옛이야기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 체계를 갖춰 복원하고 계승해 보자 해서 시리즈를 구상하게 됐습니다.”

구 작가는 옛이야기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소설과 옛이야기는 얼마나 다른 걸까.

“옛이야기는 둘 이상의 사람이 마주 앉아 말하고 듣는 것이고, 소설은 고독한 작가가 고독한 독자를 향해 자판을 두드려 보내는 모스부호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소설과 옛이야기는 이야기 자체에서도 한참 거리가 있지요. 소설을 쓰고 가르치는 눈으로 보면 옛이야기는 지나치게 소박하고 단순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의외로 깊은 뜻이 담겼더라고요. 우리 옛이야기가 전래동화로만이 아니라 더 넓은 문학 현장에서 계승되어 향유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옛이야기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대소설로서의 구체성과 개연성을 고려해 다듬거나 보태어 다시 썼다. 구어체로 써서 3권에 담은 20편의 이야기는 마치 누가 옆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실감 나고 재미있어 어릴 때처럼 마구 끌려들어 간다. 신화적인 이야기들, 기이하거나 유쾌한 이야기들, 민중의 낙관적 삶과 기상천외한 발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차례로 실렸다. 옛이야기를 단편소설로 만든 과정이 궁금했다.

“직감적으로 파악한 것을 분명하게 그리는 정도에서 곧바로 완성한 작품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논문과 여러 자료를 살피고 다양한 버전의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작업했어요. 게을러 책으로 펴내는 게 늦었네요. 어쨌든 그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될 때 즐거웠죠.”


어른들을 위한 재미있는 이야기 발굴


옛이야기를 어른이 읽는 소설로 만들 때 특별히 고려한 점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의 미적·현실적 감각을 기준점으로 삼았지요. 그러면서도 전통적 삶 가운데서 되살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살렸습니다.”

엄마로 변장해 아이들을 찾아간 호랑이, 남몰래 밥상을 차려놓은 우렁각시, 두 아이 낳고 잘 살다가 하늘나라로 가버린 무정한 선녀가 구광본 작가의 현실감 있는 묘사와 재해석을 통해 ‘깊이 있는 신화’이자 ‘납득이 가는 이야기’로 거듭났다.

옛이야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그 오누이는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피해 하늘나라로 가서 오빠는 해, 누이는 달이 되었다가 여동생은 해, 오빠는 달로 바뀐다. 구 작가의 〈해가 되어라 달이 되어라〉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바로 그 대목에서 지워진 비밀스러운 모티프를 찾아내 누이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정체를 소설 속에 그려냈다.

〈나무꾼과 선녀〉는 내용이 조금씩 다른 이본(異本)이 무수히 많은데 구 작가는 수탉유래설에 주목했다. 천상으로 올라가 선녀와 재회한 나무꾼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다시 지상으로 왔다가 발을 땅에 대면 안 된다는 수칙을 어겨 천상으로 가지 못하고 수탉으로 환생한다. 그런 결말을 통해 선녀와 나무꾼의 만남과 이별을 천상계와 지상계의 교류와 단절로 그려냈다.

분명한 해석과 설명을 하는 작업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이렇게 답했다.

“옛이야기는 유동성이 있어 이야기꾼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형태뿐만 아니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분명한 해석을 제시하되 통상적인 인식에 충격을 주거나 익히 알고 있지만 깊이 새기지 못한 것을 다시 받아들이게끔 했죠. 해석 차원에서 열린 구조가 아니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차원에서 독자에게 열린 구조를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지하세상 괴물퇴치 모험담을 담은 4권과 아기장수의 비극과 민중의 염원을 담은 5권을 마무리해 시리즈를 조만간 완결할 예정이라고 한다. 어른들을 위한 옛이야기 출간은 모험이라고 할 만하다.

“다 낡아빠진 서사에서 미래의 새로운 서사를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셈이니 엉뚱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모험이라면 모험이네요.”


한참 앞서가는 놀라운 이야기

구광본 작가는 21세인 1986년에 소설가로 데뷔한 후 바로 이듬해 42편의 시로 제11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여 문단을 놀라게 했다. 실험적인 소설을 쓰면서 대체역사소설, 옛이야기의 현대화 등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왔다.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판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아 아예 다른 판을 늘 생각해왔다는 구 작가는 자신은 이제 소설가가 아닌 옛이야기꾼이라고 말했다.

시리즈 서문의 ‘다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를 단지 다시 한다면 그것은 때늦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새로움을 담아내었다면 그것은 한참이나 앞서가는 놀라운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옛이야기꾼을 자처하는 그의 각오일 것이다.

러시아의 구전 민담을 바탕으로 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톨스토이 단편들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우리 옛이야기도 세계가 즐겨 읽게 되면 좋을 듯하다. 구광본 작가는 우리의 옛이야기를 널리 전파할 방법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다시 만나는 옛이야기’의 이야기들을 ‘원형서사’로 삼아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며,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식재산권을 공유하는 카피레프트(copyleft)로 나눌 생각도 있다고 한다. 직접 대본이나 시나리오로 만드는 일, 다른 사람이 대본이나 시나리오로 만들 수 있도록 나누는 일 등을 구상 중이다.

네이버의 오디오 콘텐츠 플랫폼인 오디오클립에 채널(channels/376)을 개설해 옛이야기를 구연하는 일도 선보였다. 옛이야기 소설화 작업의 특징이 구어체 활용이 아니라 구연 상황의 전면적 도입이어서 들려주는 일까지 시도한 것이다. 문자의 등장 이전에 옛이야기는 누군가가 들려주고 그 앞에서 재미있게 듣는 방식으로 전파되었다.

20편의 이야기 중 하나를 꼽아달라고 요청하자 〈새털옷 신랑〉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의 여러 요소를 다 가지고 있어서라며. 우렁각시를 속수무책으로 빼앗기고 새가 된 남자, 선녀와 다시 만나지 못한 슬픈 나무꾼과 달리 〈새털옷 신랑〉은 왕이 간택한 아내를 실력을 쌓아 기어이 되찾는 이야기다.
  • 201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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