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은유로 가득 차 있는 녹색의 숲 화가 김건일

거대한 ‘기억의 숲’ 앞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가로 4m, 세로 2m에 달하는 대형 캔버스에 녹색이 넘실거린다. 녹색의 농담(濃淡)이 자유자재로 변주하면서 나무와 숲, 물길을 만들어낸다. 녹색 때문에 언뜻 상쾌하고 편안한 느낌의 풍경화로 보이지만 사실은 실제 풍경을 그린 그림은 아니다.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마을, 김건일 작가 작업실에서 대형 작품을 보면서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카를 구스타프 융이 떠올랐다. 융이 이야기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 마음속 깊이 자리한 무의식을 찾아 나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그림 같았다. 원시적인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야생의 숲과 물을 그린 것 같은 몽상적인 풍경이 심리적 은유로 느껴졌다. 작가는 “기억의 편린이 뒤섞여 있는 상태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아침에 깨어날 때 조각조각 꿈의 편린이 떠오를 때가 있다. 논리적으로 전개되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고, 뒤죽박죽 앞뒤가 맞지 않지만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꿈이다. 융은 이런 꿈을 ‘무의식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설명한다. 김건일 작가 그림 속의 숲도 꿈이나 기억의 조각처럼 원근법을 무시하고 제각각 배치되어 있다. 하나의 시점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점으로 그린 숲이 한 화면에 합쳐져 있다.

“멀리서 숲을 보면 뚜렷한 형태를 지닌 풍경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막상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면 생각지도 않았던 모습이 펼쳐지죠. 야생성이 살아있는 숲일수록 더욱 이질적인 생명체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습니다.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기억은 간직하고 싶어도 잊히지만 어떤 기억은 잊으려 해도 계속 떠오릅니다. 남아있는 기억들은 조금씩 변형된 채 조각조각 꿰매어져 조각보를 이룹니다. 거대한 숲 앞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가다 보면 알고 싶지 않은 사실과 맞닥뜨릴 수도 있습니다.”

〈Career of Emotion〉, 390x194cm, Oil on Canvas, 2015
그의 말대로 깊이 파 내려가면 우리 내면 깊이 자리한 뜻밖의 무의식과 마주칠 수도 있다. 그가 그린 숲에는 우리 기억이 그렇듯 생생하게 묘사된 부분도 있고, 흐릿한 부분도 있다. 엉뚱하게도 숲 가운데 브로콜리가 나무처럼 떡하니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브로콜리를 보면 기둥과 줄기, 잎 모양을 모두 갖춘 게 나무처럼 보입니다. 천연덕스럽게 나무 행세를 하는 그림 속 브로콜리는 내 기억에 침투해 내 것인 듯 가장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들었던 타인의 경험을 내 경험인 듯 기억을 조작할 때도 있잖아요? 뇌 과학자들은 우리가 몇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기억을 재구성한다고 설명합니다. 브로콜리처럼 이질적인 요소까지 끼어들어 재구성된 기억을 진짜라고 믿기도 하죠. 개인의 역사, 사회의 역사도 그렇게 재구성되지 않았을까요?”

그는 붓에 녹색 유화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점을 찍은 후 붓이나 손으로 펴 바르면서 숲을 그린다. 물감이 많이 발린 부분은 진해지고 옅게 발린 부분은 연해지면서 수묵화의 농담과 같은 효과를 냈다. 밝게 표현하고 싶은 부분은 흰 물감을 섞는 대신 캔버스의 흰 바탕이 드러나도록 거즈로 물감을 닦아낸다. 이 때문에 두꺼운 마티에르의 유화와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 유화물감으로 그렸지만 동양화 같은 느낌이다.

한 화면에 여러 시점을 조합하는 다시점도 동양화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동양화를 그리는 방식이 은연중 몸에 배어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유화물감을 사용했는데도 서양화 작가보다 동양화 작가들이 제 그림을 더 친숙하게 느낍니다”라고 말한다.

〈Recollection in Oblivion〉, 162x130cm, Oil on Canvas, 2014
동양화를 공부했지만 그는 그 틀 안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 주제나 형식, 재료에 대한 실험을 거듭했다. 2008년 개인전 때부터 안료를 붓이 아니라 손으로 펴 바른 작품을 선보였다.

“붓보다 손가락으로 그리는 게 편했습니다. 손가락이 종이나 캔버스에 닿을 때 저만의 느낌이 있거든요. 손으로 문지르면서 농담 효과를 낼 수 있고, 즉흥적으로 표현하기도 좋아요.”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주제를 표현했다. 2008년 〈입장차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에 나온 그의 작품을 정면에서 보면 형태를 파악할 수 없다. 비스듬히 옆으로 보거나 아래에서 위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보아야 형태가 드러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회화는 정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관습을 완전히 깨뜨리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어느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하나의 사물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논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적인 객관성이 존재할까?’라는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관점, 다른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고 싶었지요.”


유화물감을 사용하지만 수묵화 느낌의 그림

〈Leaf and Bamboo〉, 73x61cm, Oil on Canvas, 2015
‘기억’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 2년간 경기도 이천의 금호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할 때부터다.

“허허벌판 가운데 스튜디오 건물 하나만 덜렁 서 있었습니다. 주변이 온통 논밭이나 언덕이어서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촬영하거나 크로키를 했습니다. 귀에 꽃을 꽂고 다니기도 하면서 마냥 좋았어요. 1년 정도 지났을 때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살펴보니 잡풀이 무성했던 곳의 장면이 제 기억과 달랐습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사실, 내 기억에 오류가 많구나’라고 새삼 느꼈죠. ‘역사에도 이런 오류가 많지 않을까?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게 존재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주제로 작업을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단일 색을 칠한 후 손가락에 천을 감고 물감을 닦아내 잡풀을 그렸다. 이 그림을 말린 다음 초록색 물감으로 덮고, 잡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손가락으로 닦아내면서 다시 그렸다. 어떻게 닦아내느냐에 따라 처음의 잡풀이 드러나기도 하고 감추어지기도 하고, 조금씩 변형되기도 한다. 기억하거나 망각하고, 기억이 왜곡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유화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작가는 “안료 가루를 손으로 문지르니 계속 손이 갈라지고 피가 났습니다. 유화물감은 마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손으로 문지르면서 농담 변화를 주기 좋아서 시도해보았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잡풀을 오버랩 작업으로 그리다 작품 소재를 숲으로 확대하면서 화면도 커졌다.

“이천에서 생활한 뒤부터 풀과 나무, 숲 등 주로 자연을 소재로 작업하고 있어요. 자연에 둘러싸여 지냈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서울에서만 지냈다면 다른 작업이 나왔겠죠. 잡풀을 그린 작품은 개인 컬렉터들도 관심을 많이 보이지만, 숲을 그린 작품은 크고 강렬해서 개인이 소장하기 부담스러워합니다. 대신 이야깃거리가 풍성해졌다고 평론가나 동료 작가들이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상업 화랑보다 미술관이나 비영리 공간에서 전시할 때가 많아요.”

건국대 회화전공 교수인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 외에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지낸다. 그러면서 매년 꼬박꼬박 개인전을 열어 새로운 작품을 발표해왔다. 올해는 6월 9일부터 10월 7일까지 독일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현대미술 전시회인 ‘노르트아트(NordArt)’에 참가할 계획이다. 세계 각국에서 선정된 작가 200명이 회화와 조각, 사진, 설치작업 등을 보여주는 전시회다. 세계 미술계가 그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지 기대된다.
  • 2018년 04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