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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정경

남성들의 연애성장서사

글 : 박소정 작가  / 일러스트 :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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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월 : 네가 이곳에 있을 때 그렇게 받고 싶어 했던 편지를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면서 안 쓰다가 네가 내 곁을 떠나 먼 곳으로 가고 나서야 이렇게 펜을 드네.

미안해. 네가 그랬지, 우리는 평생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면서 사는 거라고.

그런 말을 할 때 네 표정이 아직도 가슴에 사무친다.


이 사무치는 반성문은 〈러브 픽션〉(2011)의 남주인공 구주월(하정우)이 자신을 떠난 연인 희진(공효진)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이다. 2010년대 이후 한국 로맨스 영화들의 서사는 “반성하는 남자들의 서사”라는 평론이 나올 정도니, 영화 속 반성하는 남성들의 등장은 눈여겨볼 만한 새로운 경향이다.


로맨스, 여성들만의 성장서사?!

“사랑이란 여성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할리우드가 허락한 몇 안 되는 영역”이라는 말처럼 기존의 로맨스 장르에서는 주로 여주인공의 서사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주로 여주인공의 시점에서 진행되면서 여주인공의 내면의 변화를 따라간다. 여성들은 남성과 만남을 통해 자신 안에 있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해낸다. 그래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엔딩은 여주인공이 사랑과 일을 모두 거머쥐는 ‘명랑소녀 성공기’이거나 남성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온순한 여성성을 습득하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로 마무리된다.

여주인공 중심의 서사라고 해서 여성이 온전한 주체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여성 캐릭터는 어딘가 결함이 있다. 반면 남성 캐릭터는 여성 캐릭터보다 늘 우월하다. 1950년대에 파격적으로 등장했던 〈여사장〉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상사로 등장해 남주인공을 쥐락펴락한다. 이러한 파격적 설정이 195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도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남주인공이 도덕적으로는 더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남주인공은 여주인공보다 훨씬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되며 그녀의 허영을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1970~1980년대의 영화들에서도 청춘의 주역은 남성이다. 시대를 고민하는 것은 남성들의 몫이고 여주인공은 그 곁을 맴도는 역할에 그친다. 1990년대에도 남주인공은 철없는 여주인공을 보듬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남성은 명랑소녀 성공기의 주요한 조력자이거나 말괄량이를 길들이는 주체이다.

어느 시대나 남성들은 이미 성장이 완료된 인물들이었고, 여성의 성장을 돕거나 여성이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역할이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낭만적 사랑은 여성화된 사랑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여성만이 낭만적 사랑의 영역에서 성장하느라 분투했고 남성은 오직 유혹하거나 정복하는 테크닉의 방면에서만 사랑의 전문가가 될 뿐 로맨스 영역에서는 스스로를 배제해 왔다.


새로운 남자들의 등장

여성만의 전유물이던 ‘연애성장서사’를 언제부터인가 남성들이 공유하기 시작했다. 남주인공 시점에서 로맨스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찜〉(1998),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엽기적인 그녀〉(2001)는 남주인공 견우가 그녀와의 만남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러브픽션〉, 〈시라노: 연애조작단〉, 〈내 아내의 모든 것〉은 그야말로 남성의 반성이 주요 서사가 된다. 남성들은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자기를 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성장하는 것이 영화가 보여주는 해피엔딩이다.

반성하는 남성 서사의 등장은 남성성 자체의 변화를 암시한다.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발견되는 남성성이란 가부장제 구조에서 지배적인 형태로 수용되는 남성성, 즉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다. 즉, 로맨틱 코미디 속 남성들은 경제적으로는 여성을 부양할 능력이 있고, 정신적으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이며, 강건하고 강인한 남성성을 함양한 남성들이다. 이들은 늘 헤게모니의 주체였기 때문에 성장할 여지도, 필요도 없었다.

따라서 〈엽기적인 그녀〉에서 여자친구에게 쥐락펴락 당하는 견우 캐릭터가 탄생했을 때만 해도 그것은 신선한 것이었다. 그러나 견우 캐릭터는 이제는 너무나 전형화되었다. 〈7급 공무원〉, 〈시라노: 연애조작단〉, 〈김종욱 찾기〉, 〈위험한 상견례〉, 〈슬로우 비디오〉까지. 남주인공은 경제적 능력을 갖추지도 못하고 연애 관계에서 소극적인 태도로 주도권을 쥐지도 못한다. 소심하고 때로는 지질하기까지 하다. 초식동물처럼 온순하고 착하며 자신의 남자다움을 과시하기보다는 섬세한 감수성을 보이는 남성을 초식남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남성 캐릭터들은 초식남에 해당한다.

변화의 배경에는 남성의 경제적 영역에서의 위기가 있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경제적 위기는 곧 남성성의 위기로 연결되어 논의되곤 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청년 세대의 문제가 화두가 되었는데, 이때 청년세대의 위기란 남성 청년들의 위기로 이해된다. ‘청년실업자’라고 했을 때 흔히들 여성 청년실업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여성은 역사 속에서 늘 헤게모니를 쥐지 못한 상대적 약자였기 때문에 위기라는 말이 적용될 수 없다. 반면 남성의 헤게모니는 경제적 위기로 인해 위협받으며 남성성의 위기 담론을 낳는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에서도 남성 캐릭터의 자신감은 경제적 능력을 동반한 것이었다. 1990년대 영화 속 카사노바적 기질을 지닌 전문직 남성 캐릭터들이 대표적 예이다. 〈그 여자, 그 남자〉의 기자, 〈닥터 봉〉의 의사, 〈꼬리치는 남자〉의 향수감별사 등 남성은 사회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캐릭터였다. 이들은 때로는 고압적인 태도로 여성을 대하고 때로는 성적으로 희롱하기도 한다. 이 남성들의 사랑이 여성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영화는 가부장제 구조를 재생산했다.

2008년 이후 로맨틱 코미디 속 남주인공들은 다르다. 대기업 회사원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은 소수이며, 소득이 낮거나 일정치 않은 직업군에 종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담보살〉의 승원은 경마장에서 말 오줌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활하고, 〈나의 PS파트너〉의 현승은 밴드 일을 접고 작은 회사에 취직하지만 늘 성과를 못 내고 구박받는다. 〈티끌 모아 로맨스〉의 지웅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백수다. 이들은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여성을 만나 구원받는다.

권위를 잃은 남성은 친밀성의 영역에서 여성과 동등한 위치로 불려와 ‘연애성장서사’를 공유하게 된다. 남성은 더 이상 여성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협의하고 때로는 여성에게 선택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연인에게 귀 기울이며 연애 과정을 성찰한다.

주월 : 임은 내게 느낌표였고, 나는 임에게 마침표였다.

임은 날씨가 좋다 하였고, 나는 차를 렌트했다.

임은 ‘오늘은 왠지 슬퍼’ 하였고, 나는 바로 저질댄스 3종 세트를 작렬시켰다.

임은 때로 물음표이기도 했다.

임은 ‘사랑이란?’ 하였고 나는 당신의 부재에 따른 공포라 답하였다.


그렇다면 이로써 근대적인 가부장적 위계는 붕괴되고 로맨스 영역에서 평등과 균형이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부분적으로는 이런 남성 캐릭터들을 코미디를 발생시키는 요소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지 못하고 연애에 적극적이지 못한 남성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웃음거리가 된다. 이것은 여전히 연애 관계 속에 가부장적 구도가 정상 이데올로기로 내면화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남성이 주도하지 않는 남녀관계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반성하는 남성들의 등장은 의의 있는 변화지만, 로맨스 영역에서의 평등까지는 아직 조금 요원해 보인다.

※ 이 콘텐츠는 북저널리즘 시리즈 《연애정경》(박소정 저)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 201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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