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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삶에 지친 현대인을 위로하는 ‘푸른색 풍경’

화가 정영환

영부인 옷에 새겨진 그림을 그린 그 화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정영환 작가의 회화에는 숲과 나무, 강 등 우리가 쉽게 접하는 자연이 담겨 있다. 그런데 낯설다. 초록색이어야 할 숲과 나무는 푸른색이고, 배경은 흰색이다. 푸른색과 흰색의 조화로 바꾸어 놓은 풍경은 우리를 현실과 비현실, 가상과 실재의 경계에 서게 한다. 진부할 뻔했던 풍경이 다양한 해석과 느낌을 자아낸다.
최근 서울 와우산로 벽과나사이 갤러리에서 열린 여섯 번째 개인전에서 만난 작가는 ‘현대미술이 뭐 어려워? 진부한 풍경화가 색 하나만 바꾸어도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어’라는 치기에서 시작된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작품은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김정숙 여사의 옷에 새겨진 그림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이 들어간 흰색 재킷은 ‘기품 있고 청량한 이미지’로 극찬을 받았고, 작가에게도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수원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가 본격적으로 작업에 매달린 것은 2010년부터다. 그 전에는 17년 동안 미술고등학교와 예술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미술실기를 가르쳤다. 가르치는 일도 적성에 잘 맞아 중앙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해 미술교육을 전공하기도 했다.

온종일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작업에 전념하기는 어려웠지만,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작품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기술만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자연에 대한 관조, 미술에 대한 열정을 언젠가는 작품으로 승화시키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지요.”

‘푸른 숲’도 교사 시절 생각했던 구상이었다.

“예술고등학교에서 친한 동료 선생님과 ‘어떤 작품을 그리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면서도 신선한 자극을 받을 수 있을까?’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당시 미술계는 개념미술과 팝아트, 단색화 등이 대세였고, 전시장을 찾기 전 작가나 작품에 대해 미리 공부해야 한다고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현대미술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그냥 보기만 해도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은 없을까 고민했죠. 그러다 산과 숲 등 녹색의 자연을 푸른색으로 바꾸어 새로운 느낌을 주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의 모티프는 언제나 자연

〈그저 바라보기〉, 162.2x112.1cm, acrylic on canvas, 2015
그는 줄곧 자연을 주제로 작업해왔다.

“낙성대 근처에서 성장하면서 동네 산과 약수터를 뛰어다니며 항상 자연을 접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이 언제나 새롭게 와 닿았고, 저도 모르는 사이 자연과 동화되는 것 같았어요. 미대에 진학한 후에도 제 작업에는 항상 자연이 들어와 있더라고요. 예전에는 색깔이나 재료, 표현기법이 지금보다 훨씬 다채로운 작업을 했지만, 그때도 모티프는 언제나 자연이었습니다. 자연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어 돌멩이도 붙여보고, 아크릴물감에 쇳가루를 섞어서 칠하기도 했습니다. 철이 산화하면서 색깔이 점점 변해가는 작품이었죠.”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양평으로 모시면서 자연과 접할 기회는 더 많아졌다.

“2004년에 쓰러진 아버지는 혀까지 마비되어 말씀을 못 하시고, 스스로 호흡도 못 하세요. 자식들이 요양병원으로 모시자고 해도 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시면서 아버지를 직접 돌보셨어요. 아픈 아버지나 어머니나 답답한 서울에서 벗어나 산과 들을 보면서 사시면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어 양평 집으로 모셨습니다.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네요. 어머니는 그곳에서 농사까지 지으면서 아버지를 돌보세요. 부모님에게 위안이 될까 해서 양평으로 모셨는데, 저도 부모님을 뵈러 오가는 길에 자연을 접하면서 위로를 많이 받습니다.”


푸른색인데 따뜻하다?

〈just looking〉, 116.8x80.3cm, acrylic on canvas, 2015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자연, 부모님을 뵈러 오가는 길에 더욱 자주 접하게 된 풍경은 그의 작품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그런데 왜 푸른색일까?

“프랑스의 이브 클라인이나 우리나라의 김환기 등 푸른색에 매료된 작가는 많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부터 왠지 푸른색에 끌렸어요. 특히 깊은 바다색인 울트라 마린을 좋아해요. 푸른색은 거칠고 야만적이면서도 순수하고 신비한 색, 차가우면서도 안정감을 주고, 단순하면서도 화려하고, 귀족적인 색입니다. 인류의 시원을 느끼게도 하지요. 푸른색으로 그린 풍경이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의외로 ‘따뜻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요.”

배경을 생략하면서 푸른색과 흰색만으로 채운 그의 풍경은 청량감이 돋보인다. “배경에 흰색이 아니라 다른 색을 칠했다면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흰색 바탕의 푸른색 풍경은 담백하면서도 귀족적인 느낌이 조선 청화백자를 떠올리게도 한다. 어디에서 본 듯 익숙한 풍경이지만, 사실 그의 그림 속 풍경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인상 깊었던 풍경들을 모아 새로운 풍경을 창조합니다. 서로 다른 풍경을 조합하기도 하고, 있던 풍경에서 몇몇 요소를 빼거나 변형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꿈꾸는 보편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거지요. 울긋불긋한 색깔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제 풍경에서는 계절이 느껴지지 않고, 시간이 멈추어 있는 것 같다는 분도 계세요. 제 그림을 보면서 사람마다 각자 마음속에 있는 풍경을 끄집어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린 풍경은 대부분 정면을 보고 있어요. 안정감이 느껴지는 구도로 보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위로를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김정숙 여사의 의상에 대해 ‘팍팍한 일상에 지친 현대인을 위로한다’고 설명하던데, 제가 전하고 싶은 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2011년 인천아트페어에서 처음으로 ‘푸른색 풍경’을 선보일 때는 ‘과연 사람들이 좋아해줄까?’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화랑 관계자들보다 대중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무명작가의 작품인데도 그냥 좋아서 선뜻 구매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이후 아트페어와 개인전을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고, 2015년 수원시립미술관 개관전에서 양해일 디자이너가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의상으로 제작해 선보였다. 자신의 작품이 김정숙 여사의 의상으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기 직전이라고 말한다. 작품이 주는 느낌이나 주제가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2013년쯤 도자기업체가 제 작품으로 제품을 만들겠다고 제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제 작품이 상업적으로 활용되는 데 거부감을 느껴 거절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얼마든지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던 중 김정숙 여사의 의상으로 유명해지면서 ‘푸른색 풍경’의 작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기분 좋고 감사한 일이죠.”

그는 같은 푸른색 풍경이라도 작품마다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똑같이 기계적으로 그리는 게 싫어서 나무마다 다른 느낌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나뭇잎 하나하나에 감정을 담기도 하고, 일부러 흐릿하게 그리거나 붓 자국을 남겨 표현주의적으로 접근하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그저 바라보기-떠난 그 후〉의 경우 무엇인가를 떠나보내고 난 후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힘없이 늘어진 나뭇잎을 통해 허탈한 마음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12월 부산국제아트페어 등 전시 일정이 빼곡한 그는 “끈질기게 탐구하면서 늘 새로운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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