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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마음속에 있는 달빛 풍경을 그립니다

화가 이재삼

햇빛 아래에서는 모든 게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달빛은 사물을 적당히 가리면서 보여준다. 그 때문에 오히려 사물의 본질, 원형이 도드라지고 상상력이 뻗어나갈 여지가 생긴다. 8월 27일까지 경기도 파주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달빛: 이재삼전’에 들어서니 달빛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나무, 대나무, 배롱나무,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힌 매화나무, 폭포 등이 달빛을 받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길이가 4~5m, 10m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 앞에 서니 교교한 달빛이 빚어내는 풍경 속에 실제로 들어와 있는 듯했다. 밤바람에 댓잎이 부딪는 소리가 들릴 듯하고, 신경세포처럼 뻗어나간 나뭇가지에서 신령한 기운이 느껴졌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재삼 작가는 “낱낱이 보여주기보다 어렴풋이 보이는 모습이 더 고혹적이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제 그림이 ‘너무 섹시하다’는 사람도 있어요. 제 그림을 보고 극사실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실제 나무를 똑같이 그린 것도 아니고 달빛으로는 이렇게 보이지도 않아요. 시각적인 풍경만이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등 오감 혹은 육감으로 느끼는 풍경, 달빛이 자아내는 감성을 그리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웅숭깊고 기운찬 자태의 나무가 보는 이를 사로잡는 그의 그림 속 풍경은 사진으로 찍어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우리 마음속 풍경, 이상화된 풍경에 가깝다. 그런데도 실제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꿈꾸어온 달빛 풍경을 묘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 재료도 독특하다. 광목천에 목탄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소묘할 때 쓰는 목탄으로 화면 전체를 채우는 작가는 전 세계에서 저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연에 가까운 원초적인 재료를 찾다 목탄과 광목천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석탄, 흑연, 콩테 등 다 실험해보았지만 목탄이 제일 와 닿았습니다. 목탄은 나무를 태워서 만든 숯으로, 숲을 이루었던 나무가 마지막으로 남긴 사리라고도 할 수 있어요. 나무의 사리로 다시 나무를 표현하는 셈이지요. 가루가 날리는 목탄을 스틱으로 칠해 붙이기를 거듭하면서 예닐곱 번씩 쌓아올려 짙은 어둠을 표현했습니다. 그냥 어둠이 아니라 겹겹의 깊이가 느껴지는 어둠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작업할 때 이렇게 어둠부터 칠해놓고 나무나 꽃을 그립니다.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작업이지요. 하루 12시간씩 7개월이 걸린 작업도 있습니다. 빤질빤질하게 코팅한 캔버스와 달리 광목천은 거칠거칠한 자연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좋아요. 제 작품을 보면 작가들조차 ‘어떤 기법으로 그렸냐?’면서 신기해합니다.”

강릉대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한동안 설치와 오브제 등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근본적인 회의에 빠졌다.

“30대 중반에 작가로서 사춘기를 맞았습니다. 그때까지 제 작업이 서구미술의 시각을 그대로 따라간 게 아닌지 회의가 들었습니다. ‘작품이 이렇게 어려워져도 될까? 관객들만 주눅 들게 하는 일 아닐까? 누가 보아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 필요 없는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밭을 갈아엎듯 저 자신을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이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다시 출발하면서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담은 그림은 무엇일까’에 집중했고, 달빛을 주제로 그리기 시작했다.

“서양이 태양 중심의 문화라면 아시아, 특히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달이 중요하잖아요? 음력에 따라 생활하는 농경문화였고,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고 임을 그리워했죠. 달은 한국인의 정서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누구든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너머 Beyond There〉, 728×227cm, 캔버스에 목탄, 2006
목탄으로 인물을 그리던 그는 점차 숲과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시대 선비들이 좋아하던 세한삼우(歲寒三友)인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나무를 많이 그렸다. 나무는 그의 원초적인 정서와도 닿아 있다.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살았어요.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어딜 가나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나무에 자꾸 마음이 가는 이유가 어릴 적 기억 때문 아닐까요? 아버지는 시계 장인이셨는데, 영월에서 명품 시계를 수리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를 찾았어요. 훗날 서울에 올라오셔서 85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골동품 시계들을 수리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고치지 못하면 스위스로 보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문난 장인이셨습니다. 아버지는 고장 난 시계를 보면 ‘이것을 어떻게 살려낼지’ 의사처럼 가슴이 두근두근하다고 하셨어요. 손재주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제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요. 아버지가 시계에 일생을 바치셨다면 저는 미술에 일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직장인처럼 출퇴근하면서 몇 개월을 꼬박 바쳐 대작을 그려내는 그의 모습은 집요한 노력으로 옛 시계의 생명을 되살려내던 아버지와 비슷하다. 그는 나무를 그리면서 수백 년 된 고목을 찾아다녔다.

“한국인으로서 내가 누구인지 찾고 싶어 아내와 함께 전국 구석구석을 누비며 고목을 만났습니다. 한자리에 수백 년씩 버티고 있는 나무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 앞을 스쳐 가던 인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나무만은 깊이 뿌리내리고 세상을 관조해온 거잖아요? 그런 고목들을 만나면서 저도 철이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그 앞에 서면 경건해지면서 ‘겨우 몇 십 년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가 욕심을 부려서 뭐해’라는 생각이 들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게 됩니다. ‘돈과 명예에 연연하지 말고 남과 비교하지도 말고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자,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게 됩니다.”

2010년부터 그는 폭포, 물안개 등 물을 소재로 한 그림도 그리고 있다. 역시 달빛 풍경으로, 주변을 검게 목탄으로 칠해 희뿌연 광목천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물이 된다. 물안개가 번지는 풍경이 몽환적으로 보이면서 추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폭염 속에 찾은 전시장에서 그의 나무 그림, 물 그림이 마음을 서늘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이재삼 작가의 작품은 크리스티 홍콩, 아트 타이베이, 아트 베이징, 시카고 아트페어 등을 통해 외국에도 소개되었고, 중국, 대만, 싱가포르, 유럽의 컬렉터들이 그의 작업실을 종종 찾아온다고 한다.

“제가 주로 큰 작품을 해서 그런지 몇 년씩 계속 지켜보다 연락해오는 컬렉터가 많습니다. 제 작품들을 얼마나 속속들이 꿰고 있는지 긴장이 될 정도예요.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게 됩니다. 그림도 프러포즈와 같다고 생각해요. 화려한 스펙을 들이대면서 번지르르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평생 당신 곁에 있어줄게요’라고 진솔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 2017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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