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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색으로 표현합니다”

추상화 작가 권현진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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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진 작가가 200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전시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다.
작품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였다.
홍콩 등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기 시작한 권 작가는 요즘은 국내외 전시회와 아트페어에 초청받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그는 “제 작품을 보면서 각자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서정시를 불러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채도 높은 색들이 흘러내리고 서로 섞이면서 역동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어떤 구체적인 형상도 찾아낼 수 없는 화면이지만 강렬하고 몽환적인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만난 권현진 작가는 “제 작품을 보면서 각자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서정시를 불러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작품 제목도 〈눈으로 느끼는 시(Visual Poetry)〉이다.

“20세기 미술에서 추상화는 기존 회화를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형상을 묘사하거나 이야기를 설명하던 기존 회화에서 형상과 이야기를 제거해나가는 과정에서 추상화가 나왔죠. 하지만 제 작품은 처음부터 형상이나 이야기 없이 추상적인 사고나 느낌, 상상에서 출발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내면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눈을 꼭 감고 빛을 봤을 때 안구에 맺히는 환영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제 작품을 보고 뭘 그렸는지 모르겠다며 어려워하시는 분도 많았지만, 요즘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쉬고 싶을 때 감상하기 좋다’ ‘에너지와 기운을 얻을 수 있다’는 등 각자의 느낌을 이야기하세요.”

〈Visual Poetry#70〉, mixed media on canvas, 100×100cm, 2012
붓 자국이 보이지 않는 매끌매끌한 화면도 ‘어떤 재료로 그렸을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유화물감이나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일반적인 서양화와는 달라서이다.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한 후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대 대학원에서 페인팅을 전공했습니다.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인 뉴욕에서 생활하니 문만 열고 나가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는 작가들의 작품을 바로바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온갖 아이디어로 무장한 작품들을 보면서 여기에서 뭘 더 새로운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됐죠. 아무리 새로운 개념으로 작업하더라도 첫눈에 달라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재료 연구부터 했습니다.”

〈Visual Poetry Sculpture〉, mixed media on stainless steel, 90×90cm, 2017
그는 온갖 미술재료와 화학약품을 사들여 실험을 거듭했다.

“하루 종일 밀폐된 곳에서 작업하다 눈, 코, 입이 다 파묻힐 정도로 얼굴이 붓고 열이 나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병원을 찾은 적도 있어요. 장갑도 끼지 않고 작업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어떤 재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고농축 잉크와 우레탄을 사용해 제가 원하는 화면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고농축 잉크와 우레탄을 반복해서 붓고 칠하는 과정에서 색이 서로 만나고 섞이면서 독특한 화면이 만들어진다. 화면을 의식적으로 계획하기보다 무의식적으로 솟아오르는 이미지대로 그린다는 점에서는 초현실주의 오토마티즘과 비슷하다. 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 의도와는 다른 작품이 나오기 때문에 작업은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강렬한 색들이 용솟음치는 그의 작품을 볼 때 성격도 비슷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작가는 조용조용하고 조심스럽고 차분했다. 작가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제 내면이 활화산처럼 끓고 있나 봐요. 제 모습과 작품이 너무 다르다면서 ‘마음속에 도대체 뭐가 있는 거냐며 걱정하는 분도 계세요”라고 말한다.

〈Visual Poetry Sculpture〉, mixed media on stainless steel, 68×68cm, 2017
작가의 뜨거운 내면은 작품을 통해서만 분출되는 듯했다. 작가는 2014년 홍익대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화면에서 고채도가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질수록 표현 효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하는 논문을 썼습니다. 중세부터 현대까지 표본이 될 만한 작가들의 작품과 제 작품을 비교분석했지요. 화장할 때 입술에만 선명한 색깔의 립스틱을 바르면 안정감이 느껴지지만, 얼굴 전체를 울긋불긋 칠했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슨 사연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눈길이 가지 않겠어요? 미술작품에서도 고채도의 색상을 적게 쓰면 안정감은 생기지만, 많이 쓸수록 표현 효과가 커집니다. 제 작품의 시적인 느낌도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도 고채도의 색면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지 않나요? 고농축 잉크와 아크릴이 만나는 과정에서 생긴 제 작품 속 거품 같은 이미지가 어떻게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표현 효과를 높이는지도 분석했습니다.”

〈Visual Poetry Sculpture〉, mixed media on stainless steel, 90×90cm, 2016
그는 뉴욕에서 공부할 때부터 영상작업을 병행해왔다.

“혼자 촬영하고 편집하면서 처음에는 엉성한 영상을 만들었어요. 부족함을 느껴 기술적인 부분을 보충하려고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를 공부했습니다. 대학원 공부는 작업 방법보다 미디어철학 등 이론 위주였지요.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미디어파사드(건물 외벽에 영상을 비추는 기법) 등 재미있는 미디어아트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Visual Poetry#09〉, mixed media on canvas, 80×80cm, 2011
이번 개인전에는 페인팅과 영상작품뿐 아니라 스테인리스스틸, 렌티큘러를 활용한 작품과 조각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움직임과 에너지, 생동감이 느껴지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스테인리스스틸을 밟고 두드려서 굴곡을 준 후 작품 이미지를 씌우고 광택제를 발랐습니다. 굴곡 때문에 보는 방향과 조명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느껴지지요. 12개의 이미지를 붙여 렌티큘러 작품도 제작했습니다. 착시효과로 시각적인 환영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영상작업은 제 작품 이미지를 바탕으로 고농축 잉크를 물에 떨어뜨렸을 때 번지는 장면을 합성해 색이 용솟음치는 듯한 효과를 냈습니다. 1초에 24프레임으로 된 영상을 보면서 추상회화를 끊임없이 감상하고 있는 듯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2차원 페인팅에서도 이런 역동적인 느낌을 주려고 했고요.”

〈Visual Poetry#79〉, mixed media on canvas, 80×80cm, 2012
이화여대 졸업 후 뉴욕 프랫대 대학원과 연세대 대학원을 거쳐 홍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는 데 대해 “제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이론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공부가 제 작업의 자양분이 되기도 합니다”라고 설명한다. 요즘은 철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함께 양자물리학의 여분차원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여분차원은 이번 개인전 제목인 〈불가시의 가시화(visualization of the invisible)〉와도 맥이 이어져 있다.

“사춘기 시절부터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왜 사는 걸까?’라는 고민에 사로잡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탐구해왔습니다. 아직 공부 중이라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증명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해요. 볼 수는 없지만 진동의 패턴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최근 작품들은 여분차원에서 받은 영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게 대부분입니다. 추상적 사고에서 출발해 변형과 융합을 거쳐 만들어지는 가상의 이미지들이죠. 이 가상 이미지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으로 보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무의식을 자극했으면 좋겠습니다.”

200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전시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다고 그는 말한다. 작품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였다. 홍콩 등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기 시작한 권 작가는 요즘은 국내외 전시회와 아트페어에 계속 초청받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미국의 미술평론가 조너선 굿맨(Jonathan Goodman)은 권현진 작가에 대해 “이제 유행이 지났다고 생각했던 추상화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21세기 추상화가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2017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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