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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자기 뼈를 깎는 사람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안미옥 〈한 사람이 있는 정오〉

사진 : 안미옥 시인 제공
어항 속 물고기에도 숨을 곳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낡은 소파가 필요하다
길고 긴 골목 끝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작고 빛나는 흰 돌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지나가려고 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진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복이 우리를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진심을 들킬까봐 겁을 내면서
겁을 내는 것이 진심일까 걱정하면서
구름은 구부러지고 나무는 흘러간다
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구할 수도 없고 원할 수도 없었다
맨손이면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
나는 더 어두워졌다
어리석은 촛대와 어리석은 고독
너와 동일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오래 기도했지만
나는 영영 나의 마음일 수밖에 없겠지
찌르는 것
휘어 감기는 것
자기 뼈를 깎는 사람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나는 지나가지 못했다
무릎이 깨지더라도 다시 넘어지는 무릎
진짜 마음을 갖게 될 때까지

안미옥 시집 《온》, 창비, 2017


이 시는 “나는 지나가려고 했다”와 “나는 지나가지 못했다” 사이에 있는 마음을 보여준다. 앞의 구절은 미래를 위한 의도와 의지를 가리키고, 뒤의 구절은 현재의 시점에서 그것의 실패와 좌절을 토로한다. 어떤 길을 지나가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말하지는 않는다. 말들을 생략한 채 시인은 암시적인 구절 몇 개를 덧붙인다. 다만 “작고 빛나는 흰 돌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라고 무심히 툭, 던진다. 지나가려고 한 길이 ‘길고 긴 골목’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그 골목을 지나가려고 했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골목을 지나가려고 했던 것, 끝내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지금 시각은 정오다. 정오는 태양이 머리 위로 오고,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시각이다. 정오에는 폭풍 전의 고요 같은 정적이 사방에 내린다. 그리하여 정오에는 결핍과 결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실재하는 것들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가장 크게 부푼다. 폴 발레리는 정오는 “화염이 직조하는 시각” 이라고 했다. 정오는 빛이 극점에 이르는 시각이다. 그 빛의 극점 속에 있을 때 어둠이 우리를 덮친다. 빛이 넘치는 정오야말로 가장 어두울 때다. 때로 우리는 정오에 눈이 먼 듯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 한낮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 진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골목을 지나가려고 한다.

그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구할 수도 없고 원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갈망하고 구하는 자다. 무엇을? 무수한 갈망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너와 동일한 마음을 갖”고, 진짜 얼굴을 갖고 사는 삶을!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시인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삶의 실패에 대한 예감은 너무나도 확실하다. 두 사람은 동일한 마음을 품을 수가 없다. “나는 영영 나의 마음일 수밖에 없겠지”라는 말은 아마도 긴 탄식 속에서 뱉어졌을 테다. 그림자는 실재를 가리키고, 빛은 어둠을 품고 있다. 그것이 참이었다면 그 안에 거짓말이 있을 테고, 그것이 거짓말이었다면 그 안에 진리가 숨어 있었을 테다. 지금까지 거짓말이 진리로 통용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왔다. 이 자명한 빛의 시각, 정오는 거짓말이 거짓말임을 밝혀낸다. 과오들, 실패, 거짓말들로 짜인 삶이 한꺼번에 폭로되고 만천하에 숨겨진 진실들이 드러나는데, 이 모든 사태가 벌어진 시각이 정오다.

다시 정오. 니체는 정오가 “하나가 둘로 변하는” 찰나이고, 태양 아래 선 자의 발밑에 “가장 짧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시각이라고 했다. 니체는 “정오(Mid-day),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류의 천장”이라고 쓴다. 실존이란 사건이고, 사건으로서 겪는 시간 그 자체다. 둘은 하나가 아니고, 언제나 둘이다. 둘로 나뉜 사람은 한마음을 품을 수가 없다. 사건으로 파열하고, 하나가 둘로 나뉘는 그 삶은 정오에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을 모르고 살았을 때가 평안했다. 그랬으니 또 다른 시편에서 시인은 “매일 모르고 살겠다고 결정하였다”(〈정전〉)라고 적었을 테다. 우리는 그 결정을 반복과 번복으로 되풀이하면서 살아왔다. 문제는 이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 사태로부터 달아나지 못하고, 말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왜 그럴까? ‘진짜 마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를 모른 채 지껄이고, 진짜 같은 얼굴을 갖고 산다. 그 가짜의 삶이 불러오는 것은 ‘어리석은 촛대와 어리석은 고독’이다. 한낮의 넘치는 빛 속에서조차 촛불을 밝힐 촛대가 필요하다. 그만큼 우리는 오랫동안 어리석고, 과오와 실패들을 반복한 채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이 반복이 성장으로 이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 실패하고, 또다시 실패한다. ‘무릎이 깨지더라도 다시 넘어지는 무릎’이 일러주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다.

‘지나가려고 했지만 지나가지 못했다’라는 고백은 뼈아픈 것이다. 그 실패는 인류의 삶이 지난 20만 년 동안 이 실패를 되풀이해 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380만 년 동안 이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무시무시한 전언(傳言)을 암시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거짓을 참으로 바꾸고, 실패에서 실패를 딛고 일어나려고 시도한다. 시인은 그 사람을 “자기 뼈를 깎는 사람”이라고 명명하고, “얼굴이 밝아 보였다”라고 쓴다. 그는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생일 편지〉)이고, 지도 없이도 길을 가려는 사람이다. 그는 “무릎이 깨지더라도 다시 넘어지는 무릎”을 가진 사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로 바꾸는 사람이다. 우리는 ‘진짜 마음’으로 살기 위하여 “닫힌 입술과 닫힌 눈동자에 갇힌 사람”(〈여름의 발원〉)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안미옥(1984~ )은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7년 사물과 세계에 대한 천진한 아이의 물음을 품은 첫 시집 《온》을 펴냈다. 이 젊은 시인은 무수한 정보와 폭력들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와 타자들이 어울린 풍경을 그려낸다. 이 세속에서의 삶이 어떻게 즐거운 소풍이 될 것인가를 궁구하면서, 또는 왜 우리의 소풍이 매번 망쳐지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서. 모든 것은 ‘알 수 없음’ 속에 놓여 있다.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 끝까지 가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두 번의 산책〉). 기도하려고 손을 모았던 아이는 손을 풀었다. 그리고 “새의 얼굴을 하고 앉아 / 창 안을 보고 있다”(〈아이에게〉). 시인은 아이의 천진한 눈으로 도처에서 ‘새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 2017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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