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아빠의 청춘

글 : 박정민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해보니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는 거다.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는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눈물을 쏟고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오셨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흐르는 눈물을 아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소주 한 잔에도 빌어먹을 간이 버텨주지 못한다는 게 이유다. 때문에 넥타이를 머리에 두른 아저씨들이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 술상을 차리라며 엄마를 닦달하는 모습, 미소 가득한 입꼬리와 동시에 분노의 눈동자로 달걀말이를 만들어내는 엄마의 모습 같은 건 본 적이 없다. 좋은 구경 놓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도, 아버지의 욕지거리를 들어본 기억도 없다. 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수학 시험에서 68점을 맞아 온 날, 아버지는 대뜸 내가 엄마한테 대든다고 나를 때렸다. 아직도 내가 왜 대들었다고 생각하셨는지 모르겠다. 예상컨대 엄마의 엠씨 스나이퍼급 폭풍 꾸지람에 끼어들 비트를 찾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당신에게는 아들놈이 엄마에게 대꾸도 ‘안’ 하는 것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나는 아버지에게 각목으로 맞았고, 그 작은 각목이 부러지는 순간의 아버지 눈은 잊을 수가 없다.


‘아뿔싸, 파워 조절 실패. 때리는 것도 때려본 놈이 잘 때리는 것.’

이라는 당혹감이 그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그 이후 난 아버지에게 더 이상 맞아본 적이 없다.


하루는 화가 난 엄마가(이렇게 말하니까 자꾸 엄마가 화만 내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우리 엄마 착하다.) 내 교과서를 가위로 잘라버리려고 했던 순간이 있었다. (우리 엄마 진짜 착하다.) 그 모습을 발견한 아버지가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엄마에게 “뭐하는 거야 이 새끼야”라고 했는데, 우리는 모두 그 순간 서로의 행동을 멈추고 말도 잃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욕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지만, 혹여 만약에 하게 되는 경우가 불가피하게 찾아올 경우에도 “이 새끼”라고는 하지 않는다. 생경하고 신선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욕도 해본 놈이 잘하는 것.’

난 아버지의 욕을 그때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다.(첫 번째는 끝말잇기를 하다가 내가 ‘소세지’라고 하자 아버지가 ‘지랄병’이라고 했을 때였다. 이 또한 신선했다.)


감정 표현에 서툴다. 좋아도 좋은 티를 내시지 않아 무뚝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해도, 표현을 잘 하시지 않는다. 그저 그 무거운 한숨만 혼자서 푹푹 내쉬는 거다. 답답하고 원칙적이고 보수적이고 조용하고 늘 혼자다. 그런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내 얼굴과 똑같이 생긴 저 어른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깟 원칙과 소신 같은 건 내 미래에 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 아버지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본다. 본 적 없는 그의 과거를 추측해본다. 당신의 청춘은 어땠느냐고 혼자서 질문을 해본다. 아마도 내 청춘의 설렘과 고민과 열정과 슬픔이 아버지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졌을 것이며, 무언가에 실패하고 또 성공했을 것이다. 그에게도 꿈이 있었을 테고, 좌절도 해봤을 것이다. 알 수는 없지만 짐작은 가는 아버지의 청춘이 궁금하다. ‘국민학교’ 때 학교에 가기 싫어 짝꿍을 데리고 학교에 가지 않아 동반 퇴학을 당한 그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그 짝꿍한테 미안하긴 했을지, 당신의 연애는 어땠는지 많은 것이 궁금하다.

난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 18K 도금 비율 얼굴부터, 남 앞에서 잘 울지 못하고, 술에 약하고, 감정 표현에 서투르다는 것까지. 그런 성향이 내 꿈에 방해가 된다고 믿었고, 때문에 학창 시절 아버지를 꽤 원망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천성적으로 못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 같은 아버지가, 그리고 그의 유전자가 미웠다. 철없던 시절이었다.(지금도 없지만.)


아버지를 존경한다.

당신에게 물려받은 ‘근성’ 덕분에 쓰러지지 않았다고, 지나치게 근면 성실한 아버지의 근성이 결국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재능이자 재산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덕분에 나는 그게 뭐가 됐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쉽게 지치지 않게 됐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진행 상황을 항상 물어보고 체크하신다. 누가 보면 내가 준비하는 영화에 투자한 줄 알 정도다. 가만있어 보자. 이 정도면 이젠 나도 좀 의심이 간다.


훗날, 나도 자식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어렴풋한 예상이지만, 나 또한 그 아이에게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줄 것도 같다. 내가 미워했던 그 모습들이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노력이었던 것 같으니까. 나도 내 나름의 노력으로 내 자식에게 원칙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다는 거다. 그럼 그 자식놈 또한 난 아빠처럼 살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크게 상관은 없다. 불효자의 자식이 불효자인 건 억울할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아버지는 좀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아이가 내 아버지의 근성만은 닮았으면 좋겠다. 그럼 그 아이도 쓰러지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안 되는 건 없다. 이것도 근성으로 해내리라.


아,

그리고 50년 전 아버지의 짝꿍 어르신에게는 이 아들이 대신 사과를 올린다. 그땐 우리 아버지가 좀 어렸다. 죄송하다.

박정민은 영화 〈동주〉 〈순정〉 〈오피스〉 〈신촌좀비만화〉 〈들개〉 〈전설의 주먹〉 〈파수꾼〉,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G코드의 탈출〉 〈키사라기 미키짱〉, 드라마 〈안투라지〉 〈응답하라 1988〉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7년 04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today's pick

magazine 인기기사

topp 인기기사

daily 인기기사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