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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원형질과 서구 모더니즘의 융합

간송 전형필 손녀 화가 전인아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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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성과 중첩성이 제 그림의 특징입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그리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겹겹이 쌓아올린 우연한 흔적들로 화면을 완성합니다. 무의식의 흐름에 따라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린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 오토마티즘(자동기술법)과 비슷하고, 거친 선묘나 운동감, 형상의 해체와 재조합은 미국 추상표현주의나 독일 표현주의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월 8일부터 한 달간 서울 소공로 금산갤러리에서 아홉 번째 개인전을 연 전인아 작가의 작품은 서구 현대미술과 한국 전통미술을 융합하고 있는 듯했다. 추상과 구상을 아우르면서 거친 붓질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점에서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 빌럼 더 코닝을 떠올리게 하지만, 작품 근간에서 고구려 벽화와 전통 화조도의 유산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는 형상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작품도 많았다. 고구려 벽화에서 남쪽을 지키는 신으로 그려진 주작, 상서롭고 고귀하다는 상상의 새인 봉황 등 신화 속 동물들의 형상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희뿌연 바탕은 고구려 벽화의 회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면서 신화적인 상상력이 숨 쉬는 공간이기도 했다.


무의식에 내재한 신화적 여성상 표현

〈화조 #5〉, mixed media on silk, 58x55cm, 2017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눈과 날개가 각자 하나씩밖에 없어 암수가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하는 비익조(比翼鳥)나 봉황 같은 신화적인 동물 그리고 반인반수(半人半獸)가 많이 등장합니다. 새는 신과 인간을 잇는 샤먼 역할도 하지요. 새를 그리면서 무의식 깊숙이 내재한 신화적 여성상을 끄집어냅니다.”

전인아 작가의 친할아버지는 일제에 맞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 외할아버지는 시인 김광균 선생이고, 아버지는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내고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화가 전성우 선생, 어머니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매듭장인 김은영 선생이다. 그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뒤편, 건축가 김중업 선생의 설계로 지어진 집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성북동 집에서는 수탉과 공작, 금계 등 온갖 새들을 놓아 길렀습니다. 일상적으로도 새와 가까웠던 셈이지요. 강아지 등 다른 동물도 많았어요. 김홍도와 신윤복 등 조선시대 그림과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등 현대미술 작품들까지 두루 접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중섭 선생님 작품이 무작정 좋았어요. 어머니는 새벽 두세 시까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작업을 하셨지요. 아버지가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내던 시절, 제자들이 찾아오면 제게 ‘그림 한번 그려봐’라고 하곤 했습니다.”

〈Matrix #46〉, oil on paper, 138x145cm, 2013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문화적 특권을 누린 사람이 또 있을까?’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작가로서 축복이기만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렸다 지웠다 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실루엣만 남기도 하고 형상이 되살아나기도 하는 그의 작품. 작품 속의 불분명한 형태, 모호한 형상에 대해 작가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나 자신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데 대한 두려움, 자신감 부족에서 기인한 게 아닐까”라고 설명한다. 그는 “가족에게 인정받는 게 제일 어렵고, 가족의 평가가 가장 두려웠다”고 말한다. 언니와 남동생까지 국보급 문화재를 수시로 접하며 길러온 안목에 전문 지식까지 갖췄으니 가족 앞에서 자신감을 내비치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됐다.

그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다른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 2년 반 동안 전자회사 디자이너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내면의 욕구를 확인하면서 다시 그림으로 돌아갔고, 1997년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2014년 국민대에서 회화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는 모성과 여성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큰아이가 어릴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2~3년 살았습니다. 미국 사회는 우리나라보다 엄마 역할을 더 많이 요구했고, 저 자신은 없어지는 듯했습니다.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못 견디게 답답하면 차를 몰고 나가 두세 시간씩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모성에 대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희생적인 어머니라는 신화가 있잖아요? 모성을 그렇게만 봐야 할까 의문이 생겼습니다. 저 자신도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삼국유사에는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여성이 등장하고, 그들은 강함과 약함, 부드러움과 단단함 등 상반되는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 민족이 공유했던 집단 무의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리기는 불안·분노를 표출하고 치유하는 과정

〈body in fluid〉, mixed media on silk, 78x92cm, 2011
작가는 2007년부터 사회와 개인이 생겨나 성장하는 모체, 기반, 자궁을 의미하는 매트릭스를 주제로 작업해왔다. 인체나 새, 조개껍질, 물고기의 형상이 드문드문 보이는 작업에 대해 그는 “살아 있는 세포처럼 쉼 없이 움직이면서 생성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설명한다. 간송 집안에서 성장하며 우리 문화유산의 세례를 흠뻑 받았던 그는 대학에 들어가 서구 모더니즘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양대 축인 이 두 가지 영향을 절묘하게 융합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무의식과 과거의 시각적 기억이 뒤엉켜서 표출된다”고 말한다. 거친 필치나 강렬한 색채로 개인의 뜨거운 내면을 토해내면서도 우리 민족의 원형질을 찾아나가는 작품이 여기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두꺼운 마티에르를 구사하는 대신, 장지와 비단에 수성과 유성의 다양한 매체를 혼합해 그리면서 반투명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직관적인 행위의 흔적을 오롯이 남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장지와 비단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기와 지우기의 반복으로 만들어진 반투명한 화면은 제 감정의 표출인 드로잉과 붓질이 소통하면서 호흡하는 유동적인 공간이 됩니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의 작품은 즉흥성과 우연성, 제스처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추상표현주의와 비슷하지만, 한 획 한 획의 운필로 작가정신을 표현하는 서화일치(書畵一致)나 여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동양화의 전통을 잇는다. 화면의 여백에 대해 작가는 “매트릭스에서 뿜어져 나온 생명의 숨결이 호흡하는 영역, 우리 상상력이 틈입할 입구”라고 표현한다.

〈Bong #1〉, mixed media on silk, 70x95cm, 2017
초등학생과 고등학생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작가는 거실 한쪽에 미술도구들을 펼쳐놓고 작업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업과 생활이 구분되지 않는 삶에서 그림은 내면의 표출이자 일상의 기록이 된다. 그게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엄마로서의 삶을 모두 지킬 수 있는 하나의 타협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다.

“그리기는 제게 놀이이자 치유 과정이기도 합니다. 색채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몸을 움직이고, 그 결과물을 볼 때의 쾌감이 크지요. 순간순간 떠오르는 이미지를 포착해서 표현하는 일은 내적인 불안이나 분노를 표출하고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활달한 필치와 풍부한 색채로 강렬한 에너지를 보여주는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점점 키워나갈 때 어떤 작품이 나올지 기대된다.
  • 2017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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