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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대신 헌책으로 자연과 도시 표현

작가 이정웅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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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똘히 작품 구상을 하다 우연히 책장 옆에 쌓아둔 책들에 눈길이 갔습니다. 오래된 책과 요즘 책들이 뒤섞여 있는 게 옛날이야기와 최근 이야기가 웅성웅성 함께 들리는 듯했습니다. 누렇게 바랜 책의 옆면은 활자와 그림을 머금은 채 세월의 더께까지 쓰고 있었죠. ‘저걸로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강렬한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책의 단면을 물감처럼 사용한 촉각적인 화면

〈City story〉, 책·종이죽·혼합재료, 116.8x80.3cm, 2016
서울 인사동 장은선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만난 이정웅 작가는 책의 단면을 물감처럼 사용한다. 책 내용과 바랜 정도에 따라 크림색, 누런색, 갈색, 진갈색, 회색, 회백색 등 다양한 색감을 드러내는 책의 옆면을 커터로 잘라낸 후 캔버스에 붙여 형상을 만든다. 책의 단면들이 모여서 도시 풍경이 되고, 꽃과 새, 나무, 산과 폭포가 된다. 닭의 형상은 특히 기운생동, 활기가 넘친다. 수탉의 깃털 하나하나가 굵은 붓으로 한 획 한 획 그은 듯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닭 작업을 하면서 저 역시 기운을 얻어요. 닭은 예로부터 어둠을 물리치고 새벽을 불러오는 존재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더욱 위엄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려고 합니다. 선배 중에 개, 고양이와 함께 닭을 스무 마리씩 키우는 분이 있어요. 그 선배가 멋진 포즈의 닭 사진을 보내주기도 하고, 제가 직접 가서 촬영해오기도 합니다. 7~8년 전부터 전시 때마다 닭 작품을 한 점씩 내놓았더니 사람들이 그 작품 앞으로 모여드는 거예요. 작품도 거의 다 팔렸고요. 닭이 제게 알을 낳아준 셈이지요.”

그는 국내에서 2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을 뿐 아니라 미국, 독일, 싱가포르, 터키 등에서 열린 전시나 아트페어에도 여러 차례 참가해왔다.

〈The king cock〉, 책·혼합재료, 72.7x90.9cm, 2016
“우리나라보다 외국에 나갔을 때 반응이 더 좋아요. 오래된 책을 사용한다는 데 대해 굉장히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2010년 뉴욕 아트페어에서 있었던 일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시인이라는 분이 한참 동안 제 작품 앞을 떠나지 못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이 작품을 사고 싶지만 지금은 돈이 준비되지 않았다’면서 계약금을 걸어놓고 아트페어 마지막 날에 찾으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작품을 가져가면서 ‘친구들을 불러 이 작품을 보여주면서 파티를 하겠다’며 정말 좋아했습니다. 책의 단면으로 논다랑이를 표현한 작품이었는데, 그분에게는 책이 가득 쌓여 있는 책장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보는 사람마다 이렇게 자기 식으로 해석하는 게 좋아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이정웅 작가는 전주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줄곧 고향에서 작업을 해왔다. 고지식해서 그런지 미술작업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한다.

〈The king cock〉, 책·혼합재료, 72.7x90.9cm, 2016
“초등학교 2학년 때 세계어린이미술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어린이회관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려고 아버지와 함께 처음 서울을 찾았던 기억이 나네요. ‘내가 이걸 잘하나보다’라는 생각에 그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누가 장래 희망을 물으면 언제나 ‘화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서울대나 홍익대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연거푸 떨어졌어요. 군대에 다녀온 후 전주대에 입학하면서 ‘어디에서든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는 그때 이후 한결같이 고향에서 작업해왔다고 말한다. 무명작가 시절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물었더니 “제 주변에 참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전업 작가로 열심히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딴 데 눈 돌리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지요”라고 말한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조금 먹고 소박하게 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내가 많이 이해해줬고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니 부자가 아니어도 행복하고, 굶지도 않더라고요. 굶지 않을 만큼 작품이 팔렸고, 제가 사는 지역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은 다 받았습니다. 상을 받을 때마다 ‘나도 후배들에게 열심히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버려지는 책’에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

〈Looking through the window〉, 책·혼합재료, 81.5x41cm, 2016
2004년부터 그는 헌책을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책을 수집한 후 접착제로 붙여 펼칠 수 없게 만든다. 책은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머금은 채 입을 다문다. 그다음 회를 떠내듯 책을 칼질한다. 그렇게 확보한 책의 단면들을 화면에 붙여 형상을 만들고, 책을 찢은 후 물에 불려서 만든 종이죽으로 바탕을 채운다. 온갖 책의 내용을 하나로 뒤섞는 셈이다. 종이죽에 색을 칠한 후 그 위에 모래보다 고운 금강사를 입히기도 한다. 물감의 마티에르(질감)보다 훨씬 더 촉각적인 화면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한국성’에 대해 고민해왔던 그는 산수화와 화조도 등 우리 전통 그림을 재현하면서 책의 단면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필묵의 힘까지 보여준다. 노송의 나무껍질까지 생생하게 묘사해낸다. 나무가 종이, 책으로 바뀌었다 다시 나무를 묘사해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의 작품은 책을 수집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보통 지인들의 책을 얻어 옵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작업하고 싶거든요. 재야 시인이셨던 선배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1박 2일 동안 서재 정리를 도와주면서 책을 얻어온 적도 있어요. 1950~1960년대 문학잡지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안에서 내려오던 고서, 아이들이 보던 교과서도 작품 재료가 되었습니다. 책의 내용들을 뒤섞어 제 나름대로 재구성하니, 작품들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저는 알지요. 색깔에 변화를 주기 위해 보통 요즘 책과 옛날 책을 섞어서 작업하지만, 셰익스피어 전집 하나로 작업한 적도 있어요.”

〈City story〉, 책·종이죽·혼합재료, 60x60cm, 2016
접착제로 붙이면 나무토막보다 딱딱해지는 책을 커터로 잘라내는 작업을 하다 보니 손을 벤 적도 많고, 어깨와 팔, 손가락 관절이 너무 아팠다.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계로 자르라는 충고도 많이 들었지만, 그는 요즘도 수작업을 고수한다. 작가의 손맛을 포기할 수 없어서다. 큼직하게 자를 때만 작두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전시장에서 제 작품을 보고 ‘책을 이렇게 난도질한 것을 보니 가슴 아프다’는 분도 있어요. ‘버려지는 책들을 가져다 제 나름대로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하지요. 책을 활용하는 이 작업이 너무 재미있고, 무궁무진 할 게 많아요. 이제는 형상을 조금씩 허물어 추상작업으로 나가고 싶어요.”

고향에 틀어박혀 작업하면서도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에 작품을 선보여온 그는 올해에도 서울에 이어 싱가포르와 홍콩, 창원과 전주 등지에서 열리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 2017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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