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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여관”에서 칸나의 환함을 꿈꾸다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이병일 〈진흙 여관〉

숙박부 속을 뒤집는다 해도 이 진흙 여관 일부가 썩어간다 해도 삶은 멱살잡이를 할 수가 없다

진흙 여관엔 흐르는 시간 따위는 없다 미끈한 것들이 악취가 나도록 뒹굴지만 정작 몸과 뼛속은 차가워진다

붕괴도 낙상도 없어 헛짚는 생각마저 촉촉하고 끈적끈적하다 처참히 봄의 꽃나무들이 무너질 무렵 진흙 여관은 점점 물가 쪽으로 기운다

가장 더럽고 추한 곳이 진흙 여관인데, 물정 모르는 것들이 텅텅 빈 수렁의 방을 가꾼다 때로는 컴컴한 헛간도 징후가 없이 웅덩이 냄새를 키운다

침 범벅의 아가미들이 진흙 여관에서 다시 떠날 힘을 얻듯 그렇게 진흙 외투를 입고서 산란기를 견딘다

이병일 시집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 창비, 2016


어떤 삶도 비참함과 누추함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빛날 수가 없다. 젊음이란 곧 견디고 뚫고 나가야 할 극지(極地)와 같은 것. 하다못해 목련나무도 “북풍을 뚫고 자란” 뒤에야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고, 야생의 생명들은 발톱과 이빨이 피로 물들어야 겨우 한 줌의 생존이 허락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것들은 불가능한 것들로 엄연한 현실의 장에서 비정규직 저임금에 내몰리는 젊은이들이 감당하는 어김없는 실존의 진실이다. 젊음이란 수렁이고 덫이며, “봐주지 않으면 없을 아름다움”(〈사각형의 수족관에서〉)이고, “금세 녹아내리는 영원”(〈꽃피는 능구렁이〉)인 것이다. 이병일의 시편들은 “목을 점점 옥죄는 올무”와 “몸 안의 비린 것들을 항문으로 밀어”내는 개같이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살기 위해 치러내는 비명을 은유의 문법 속에서 잘 드러낸다.(〈화창한 기적〉)

청춘의 한때 우리는 먼 곳을 바라보며 언젠가 그곳에 도달하리라 꿈꾸었다. 우리 피는 붉고 힘차게 맥동하며, 이 세상이 난폭하고 거칠어도 그걸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현실과 드잡이를 하다가 우리 날개는 속절없이 꺾이고, 삶이라는 수수께끼는 더욱 풀 수 없는 것으로 변하며 모든 일에서 실패는 관습이 되었다. 그때 우리는 꿈을 하나씩 떠나보내면서 현실의 오탁(汚濁)을 온몸에 묻히며 나이가 들기 시작했다. 더러는 철들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게 현실과 타협하는 나약함에 대한 위로라는 걸 깨달은 건 한참 뒤다. 그 파릇하던 시절을 한 시인은 “진흙 여관”에서 보낸 시간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더럽고 추한” 곳, 혹은 “물정 모르는 것들이 [머무는] 텅텅 빈 수렁의 방”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구체적으로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가 없는데, 시인은 그곳을 “진흙 여관”이라 명명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모든 것은 썩어가고 무너지고 기울어져간다. 이런 수사적 표현에 기대어 생각을 뻗으면, 이곳이 살기에 쾌적한 데가 아니라 의미가 고갈된 최하의 생존 조건이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각마저 촉촉하고 끈적끈적하다.” 촉촉하고 끈적끈적하고 미끄러운 감각은 이곳이 습기가 많은 곳이자 동시에 쾌가 아니라 불쾌의 부정적 경험을 낳는 곳이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촉각을 자극하는 이미지에서 연상하는 것은 가장 낮은 단계에서 비비적거리고 몸부림치는 삶이다.

수렁, 웅덩이와 같은 이미지들은 자연스럽게 습지 생물의 생태를 연상시킨다. 과연 이곳에서 사는 생물들은 “침 범벅의 아가미들”을 갖고, “진흙 외투를 입고서 산란기”를 견디는 생물들이다.

아, “진흙 여관”은 메기 따위가 사는 진흙의 늪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그런데 왜 시인은 늪의 은유를 끌어왔을까? 누구나 어느 한 시절 그런 “진흙 여관”에 머물며 고투한다. 그 시절 우리 안에는 주린 개들이 우글거렸다. 그때 우리는 똥파리같이 “동공 풀린 눈동자에 박힌 저승을 빨아 먹”었든지, 주린 입으로 “개 밥그릇 테두리 이빨 자국을 핥”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삶의 최저주의 속에서 우리가 내지른 “질컥하고 끈끈한 피오줌”은 끝내 “칸나의 환함”으로 보상받는다. 그런 희망으로 낮은 포복을 하며 삶을 밀며 산 것이다.(〈투견의 그것처럼〉)

저 젊은 시절 한때 나 역시 “진흙 여관”에서 숙박부를 적고 지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입고 있던 “진흙 외투”는 정말 무거웠다. 나는 진흙 속에서 꿈틀대고, 침 범벅의 아가미를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 시절 모든 꿈들은 가망 없는 희망들이었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약해서 툭툭 잘 부러졌다. 그 약하고 가느다란 꿈들은 그 실현 불가능성 때문에 더 아득하고 아팠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젊은 시절 희망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봄나무들이 꽃 피우듯 끓어오르는 젊음의 꿈을 펼치지 못한 채 빈 수렁 같고, 컴컴한 헛간 같은 현실에 갇힌 채 헛짚는 생각들에 빠져 다만 존재를 공회전 시킬 때 그것은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가! 아직 젊은 이병일은 한 시절의 음습한 절망, 한 시절의 수난, 한 시절의 역경과 어떻게 싸우고 그것을 견딜지에 대해 쓰고 있다. “진흙 여관”에서 그 절망과 수난과 역경을 도약대 삼아 “칸나의 환함”으로 피어나 약동하기 위하여!


이병일(1981~ )은 전북 진안에서 태어났다. 이병일의 시들은 호랑이, 기린, 당나귀, 사슴, 수달, 백상아리, 불개, 멧돼지, 눈표범, 산양 같은 동물들을 자주 호명하는데, 이 동물 이미지들은 현대 문명사회의 폐해들로 인해 불가피하게 죽어가는 야생 자연의 기호들이다. 이것들은 저마다 생명의 약동을 드러내는데, 이것이 가리키는 지점은 세상을 살아내는 일의 신산함과 누추함을 물리치고 솟아오른 빛남이다. 이것들은 “사방이 어두워지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는 구제역의 밤”이고, “난데없이 파놓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돼지들의 비명이 음산하게 허공에 울려 퍼지는, 지금 여기의 연옥 같은 현실과 얼마나 또렷하게 대비되는 것인가.(〈저승사자와 봄눈과 구제역〉) 이 젊은 시인의 현실 인식은 어둡고 음산하다. 산 것들이 “느물느물 더럽게 죽어”가는 현실에서 발악하고 피비린내 나도록 싸우는 까닭이 “칸나의 환함”을 피워내는 일이기 때문이다.(〈투견의 그것처럼〉)

이병일 시인은 2007년 문학수첩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시집으로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 등이 있다.
  • 2017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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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동동   ( 2017-01-18 ) 찬성 : 4 반대 : 2
이병일 시인 너무 잘 생기셨고 무엇보다 시가 최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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