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악몽

글 : 박정민 

꿈을 자주 꾼다. 며칠 전 입에서 불을 뿜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깼는데 알고 보니 입에서 침을 뿜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코골이 수술 상담을 받았다. 코골이와 무호흡증 등으로 깊은 잠에 들지 못하니 꿈을 자주 꾸는 것이라 판단했다. 괴로웠다. 꿈을 자주 꾸는 것이, 그리고 그 꿈의 대부분이 악몽이라는 것이 말이다.

그 좋지 않은 꿈이 너무나도 생생한 날이면, 마치 정말 있었던 일이라는 착각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어떻게든 부랴부랴 정신을 차린다지만 그 씁쓸함이 금세 사그라들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는 거다. 신경정신과가 아닌 수면클리닉을 선택한 건, 악몽을 꾸지 않는 쪽보다 꿈을 아예 꾸지 않는 쪽이 좋지 않을까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꿈을 꾸지 않겠느냐만 나름 신선한 초이스였다는 생각이다.

“I dreamt a dream tonight. In bed asleep, while they do dream things true.”
(“간밤에 꿈을 꿨어. 잠을 자면서 때로는 맞는 꿈을 꾸기도 해.”)
《로미오와 줄리엣》 1막 4장에 나오는 로미오의 대사다. 로미오는 극 중에서 꾸준하게 꿈과 운명을 이야기한다.(문맥상 그 꿈들이 좋은 꿈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꿈과 운명에 시달리며 비극을 향해 걷는다. 아니, 비극과 마주할 때마다 늘 꿈과 운명을 탓한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중2병 말기다. 그 모습은 마치, 나쁜 일이 일어나면 이때다 하고 그날의 악몽을 탓하는 본인과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수면클리닉으론 해결이 안 될 것 같다. 이런 건 회초리가 약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나 지금이나 다들 꿈과 운명에 관심이 지대한 것 같다. 그 옛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부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지나, 새해가 되면 사주팔자를 인터넷에서 뒤져보는 현재까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싶은 욕구는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본인도 그 본능 때문에 커피는 맛이 없어도 점은 용하다는 사주카페를 찾아갔다. 아주머니는 내게 2017년에 성공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이만 원을 받아 챙기셨다. 맛없는 커피까지 하면 이만오천 원이었다. 그날 나는 이만오천 원으로 운명을 산 셈이다.

사실은 성격인데 말이다. 악몽을 꾸는 것도, 그를 탓하는 것도 그저 성격 때문이라는 거다. ‘성격이 운명이다’라는 말처럼, 참 꾸준히도 생긴 대로 사는 것이다. 퍽퍽하고,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은 일이 잦은 인생. 돌이켜보면 그렇지만도 않은데 그렇다고 생각한다. 성격인 거다. 사주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웃고 끝내면 될 일을 가지고,
“아줌마 나 누군지 알죠.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왔죠?”
라고 되묻는 것도 성격이다. 결국 돌아오는 건 ‘니가 누군데’ 하는 눈빛뿐이고, 괜한 말을 했다는 자책뿐인데도, 그렇게 물어봐야만 직성이 풀린다. 역시나 회초리가 약인 것이다.

본인의 책을 읽은 몇몇 지인들이 내게 지독한 비관론자 같다는 말을 건네 왔다. 정답이라고 말해줬다. 최악을 설정해야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라서 그렇다고도 말해줬다.(그중 몇몇은 공감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게 성격이고 버릇이라고, 따지고 보면 그런 성격이 항상 최악을 가져오지만은 않았다고 보태줬다. 물론 괴롭다. 악몽을 꾸는 건 당연히 최악을 대비하는 본인의 두뇌 회로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일 테고, 때문에 남들보다 대사량이 높아져 점점 말라가는 것이겠지. 제 명에는 못 죽을 팔자다. 로미오처럼.
‘아 왜 자꾸 지가 로미오래.’
‘디캐프리오가 소송 걸듯.’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이건 아니지. -윌리엄 셰익스피어-’

12월, 국립극장에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무대에 오른다. 그렇다. 내가 로미오다. 코미디냐고. 아니다. 근데 그렇게 될 것 같아 무섭다. 오늘도 악몽을 꿀 것 같다. 좌우지간, 연습이 한창이고 문득 생각이 많아졌다. 운명의 희생양인 줄로만 알았는데, 모든 것이 그가 만든 운명이라 생각하니 그의 어린 나이가, 눈먼 사랑이, 뜨거운 열정이 측은하게 다가왔다. 마치 신화 속에나 등장하는 고상한 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어린아이였다. 비극적인 순간마다 꿈을 외치고 운명을 탓하는 그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지금의 나 혹은 우리처럼 말이다. 우리도 그처럼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고 울어본 적이 있고 운명을 탓해본 적이 있다.
‘안 될 놈은 안 돼.’
‘내가 그렇지 뭐.’

시궁창 같은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는 지독한 비관론이지만, 그러면서도 결국 훗날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바뀔 수 있을 거란 기대감과 바꿀 수 있을 거란 기대감. 땅을 파고 파고 파고 들어가 지쳐 쓰러져도 결국엔 그 기대감이 ‘바꿀 수 있다’라는 주문을 거는 것이다. 그렇게 난 또 최선을 다해 최악을 대비한다.
악몽. 혹은 악몽 같은 현실.
바꿀 수 있다.
라고 주문을 거는 것이다.

박정민은 영화 〈동주〉 〈순정〉 〈오피스〉 〈신촌좀비만화〉 〈들개〉 〈전설의 주먹〉 〈파수꾼〉, 연극 〈G코드의 탈출〉 〈키사라기 미키짱〉,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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