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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날씨에 따라 변한다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려원 〈사과 한쪽의 구름〉

사과의 날씨가 지나갔다.

반으로 쪼갠 사과 한쪽을 창틀에 놓고 잊어먹고 있었다.

며칠 뒤 사과는 먹구름이 잔뜩 끼여 있었다. 그동안 사과를 지나간 날씨들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반쪽의 빨간 껍질에는 지평선을 넘어가던 노을이 있었고 달은 사과 속을 들락거리며 반달이 되었다가 다시 만월이 되었다.

달은 사과의 밝기를 주기적으로 조절하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는 사과 씨로 배란일을 계산했다. 달이 회전하는 단면과 사과 반쪽의 단면이 만조를 이루던 날, 사과 속살에 둥둥 떠다니는 상현달과 하현달 중 어느 쪽을 고를까 고민했다.

사과가 쪼글쪼글해지는 시간, 내가 갈라놓은 곳으로 달이 자라서 다시 야위었다. 초음파에는 먹구름으로 가려져 있었다.

내 뱃속에 들어 있는 사과가 파란 날씨를 지나 빨갛게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려원 시집 《꽃들이 꺼지는 순간》, 시와표현, 2016


사람은 땅 위에서 움직이며 공동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관계를 맺으며 사는 존재다. 땅은 물적 토대이고, 기후의 조건이자 활동하는 자아를 기르는 장소다. 사람은 땅에서 태어나 땅의 변화에 순응하며 사는 존재다. 땅 위에 서는 것은 실존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아득한 일인가? 한 철학자는 이렇게 쓴다. “단단한 땅 위에 서 있으려면 아직 멀었다.”(니체, 《반시대적 고찰》) 우리가 활동하는 땅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순환하며 지나간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포악한 운명의 화살을 가슴에 꽂은 채 비틀거리고 휘청거리는가! 더러 고갈과 탕진으로 땅 위에 널브러진다. 땅 위에 직립하는 자는 땅에 쓰러진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쓰러진 경험을 통해 바로 서는 법을 익힌 까닭이다. 우리는 대지 위에 살면서 많은 것들을 본다. 우리는 먼저 ‘봄’으로써 이 세계-내-존재의 일원이 되는데, ‘본다’는 행위는 눈을 통해 이루어진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눈이라는 신체기관을 통해 무언가를 봄으로써 지각적 대상 세계에 연루된다는 사실을 두고 “우리가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볼’ 수 있기 때문에 눈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봄’으로써 타자의 세계에 접속하고 참여한다. 보는 눈이 없다면 실존은 크게 제약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바라-봄’ 속에 자연은 그 전체를 열어젖혀 우리 앞에 그 모든 비밀을 개시(開示)한다.

보라, 우리는 타인과 그들이 만든 세계, 그리고 계절과 풍경들을 본다.

날마다 변하는 날씨는 시인들에게 시적 영감을 주는 것들 중 하나다. 날마다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날씨들은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바가 있다. 날씨와 더불어 계절의 변화도 우리 기분과 영혼을 쥐락펴락하며 감정의 변천사를 만든다. 궂은 날씨냐 화창한 날씨냐에 따라 우리의 기분은 달라진다. 또한 기후 변화는 수면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고, 식욕 부진의 원인이 되며, 체중 감소를 일으킨다. 날씨와 계절들이 우리 생체리듬에 영향을 주는 한에서 그것들은 여러 ‘생물학적 변수’들을 만든다.

사람이 날씨에 따라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바다. 한 책은 날씨가 우리 “행동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체 기능 속에서 자신이 처한 환경과, 자연의 순환주기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자연의 순환주기란, 지구의 자전과 이어지는 24시간 주기(낮/밤)와, 광(光) 주기의 변동이 수반되는,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공전과 연결되는 계절 주기들을 뜻한다. ‘생물학적 변수’라 부르는 여러 가지 물질이 이 순환 주기들에 따라 우리 신체를 통해 생산되며 우리 행동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는다.”(알랭 코르뱅 외, 《날씨의 맛》, 길혜연 옮김, 책세상) 햇빛은 예민한 영혼을 순수한 기쁨으로 물들게 하지만, 악천후와 비구름 아래 펼쳐지는 잿빛 풍경은 기분을 무겁고 칙칙하게 하고, 비와 바람 부는 날씨는 마음을 울적하고 스산하게 만든다. 시인은 “사과의 날씨”나 구름 낀 날씨에 어떤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가?

시인은 “사과의 날씨” “반으로 쪼갠 사과 한쪽” “사과의 밝기를 주기적으로 조절하”는 달, 여자의 “배란일”을 겹쳐내며 생명 잉태의 순간으로 상상력의 촉수를 뻗는다. 시인은 사과가 탱탱하던 순간에서 “사과가 쪼글쪼글해지는 시간”에 이르기까지의 사이, 혹은 초음파와 먹구름 사이를 사유한다. 그 사이는 달의 날씨가 지나가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달의 시간”에 어떤 일들이 생기는가? 달은 부풀어 만월에 이르렀다가 다시 야위어 하현달이 되는데, 이 변화를 “달이 회전하는 단면과 사과 반쪽의 단면이 만조”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과를 둥글게 익히는 “달의 시간”이라니! 이 시간은 여성 화자인 ‘나’의 몸에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는 시간과 정확하게 조응한다.

시인은 눈부시게 바뀌는 계절을, 산과 강을, 하늘의 구름을, 수많은 도시들과 시골을, 뱀과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과 무심히 지나가는 타인들을 본다. 더러는 사물과 현상, 변화무쌍한 기상 현상에 대해 숙고 과정 없이 즉물로 반응한다. 시에서 시각적인 것, 후각적인 것, 촉각적인 것에 민감한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다. 첫 시집을 펴낸 려원도 천진한 눈으로 사물을 보고 ‐ “우리는 왜 같은 맛의 음식을 매일 먹고 / 같은 베개를 베고 같은 시간을 정해 잠깰까” 같은 천진한 의문들! ‐, 드물게 신체 기관의 감수성이 발달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상상력은 범속한데 가끔 의외의 상상력이 돌출한다. “우물들은 모두 자웅동체(雌雄同體) / 장마를 산란하기도 한다”라는 구절은 놀랍다. 우물들이 자웅동체라거나 장마를 산란한다고 하는 것 따위는 엉뚱하면서도 발랄하다. “친절한 삼촌들은 욕을 하고 / 절정들은 모두 가짜”라고 할 때 상상하는 것의 범속성이 뒤집어진다. “늘 꿈에서 뒤꿈치를 들고 넘겨다 본 담장 안엔 / 미래의 사람들 모여 있었었어요”라는 구절은 샤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려원(1977~ )은 려원은 2015년 시 계간지 《시와 표현》으로 등단한다. 한때 원통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그 뒤 아동복지시설 주말 프로그램 문학강사,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문학강사로 활동한다. 이 발랄한 시인은 사물과 현상, 변화무쌍한 기상 현상에 공적인 숙고 과정 없이 즉물로 반응한다. 려원의 시에서 시각적인 것, 후각적인 것, 촉각적인 것에 민감한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 시인의 상상력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여성성의 은근한 과시다. 여성성에 대한 시적 사유는 인공수정, 포상기태, 입덧, 탯줄, 양성, 배란기, 산부인과, 쌍둥이, 초음파, 무성생식 따위 어휘들이 암시하듯이 여성의 출산 경험과 연관된다. 2016년 첫 시집 《꽃들이 꺼지는 순간》을 펴내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 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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