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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꿈 사이의 풍경

작가 윤병운

고요하다. 조용조용 세상을 덮는 눈으로 뿌옇게 흐려진 바깥 풍경. 아래위로 길게 나 있는 격자창 너머로 벽돌집 3채와 나목들이 보인다. 그런데 벽에 뚫려 있는 격자창과 마주보이는 집들의 격자창 형태가 똑같다. 똑같이 생긴 집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일까? 사실은 집안에서 내다본 창밖 풍경이 아니었다. 조각조각 풍경을 나누어 담고 있는 27.3×41cm의 직사각형 캔버스 45개를 붙여놓은 전시장 벽면이다. 창틀처럼 보이도록 치밀하게 계산해서 배치한 캔버스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화면을 이루면서 격자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 듯 착시를 일으킨다. 캔버스의 프레임까지 화면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경계가 모호한 세계

〈Same Time〉, oil on canvas 145.5x112cm, 2015
차가운 겨울 풍경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을 보면서 왠지 따스하고 평온한 느낌이 들었다. 벽난로라도 피워 놓은 따스한 실내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삼각 지붕의 벽돌집이 단단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인 데다 좌우대칭인 화면 구도 때문에 더욱 안정감이 느껴진다. 작가는 이렇게 질서 잡히고 평화로운 세계를 꿈꾸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 3월 5일까지 열리는 서울미술관 〈비밀의 화원〉전에서 이 작품 〈Windows〉를 선보이고 있는 윤병운 작가를 만났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과 비슷했다.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수선스레 자신을 내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Windows〉의 풍경은 실제 풍경이 아니다. 풍경에 등장하는 집조차 실제로 존재하는 집이 아니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집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모습, 원형을 그렸다고 한다.

“집을 설계한다는 생각으로 벽돌 개수까지 일일이 계산해서 그렸습니다. 그런데 제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의 근현대 건축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작품이 서울시청 신청사에도 걸려 있어요. 신청사와 과거의 역사를 연결하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실제 풍경을 묘사한 것 같은 작품은 사실 그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다. 그의 작품은 이렇게 내부와 외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면서 경계가 모호한 세계로 이끈다. 어릴 적 그의 꿈은 만화가였다. 스스로 만화책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여줬고, 배경을 더 잘 그리고 싶어 동네 화실을 찾았다가 화가가 되었다. 홍익대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마쳤다. 그의 작품은 몇 번의 변모 과정을 거쳤고, 지금도 계속 변화하는 단계에 있다고 말한다. 2003년 첫 개인전에 나온 작품들에서는 손이나 팔, 다리 등 신체 일부가 3차원 공간을 암시하는 선들과 만난다. ‘회화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화면의 조형성을 실험하던 시기였다. 2005년부터는 인체 대신 토르소가 등장한다. 머리와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몸통만 남은 그리스 조각들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전시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 갔던 길에 뉴욕 박물관들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굉장한 에너지를 느꼈지요. 엄청난 시간을 견뎌내고 아우라를 내뿜는 작품들 앞에서 현대미술의 담론 사이를 헤매던 저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죠.”

〈Windows〉, oil on canvas, 350x215cm(27x41cm(each)x45ea), 2014
〈같은 꿈〉 〈자각몽〉 같은 그의 작품에서는 청명한 하늘과 푸른 초원에 나무들이 지평선을 따라 줄지어 서 있고, 고대 그리스의 토르소들이 등장한다. 화면의 5분의 4를 차지하는 하늘과 길게 펼쳐진 평원, 그리고 나란히 서 있는 나무는 이후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풍경이다.

“미국 여행 중 버스 안에서 우연히 봤던 풍경이 어느새 제 조형언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풍경의 원형과 가깝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그린 게 아니지만 제 작품의 기본 축이 되었죠.”

〈Windows〉, oil on canvas, 270x173cm(21.2x33.5cm(each)x 45ea), 2016
작가는 있음직한 풍경과 박물관에 놓여 있는 고대 조각을 한 화면에서 만나게 했다. 꼼꼼한 붓질로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아 실제로 초원에 조각을 설치해 놓은 것 같지만, 어딘가 낯설고 새롭다. 꿈속에서 보는 장면처럼 모호하다.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이 겹치고 그 경계는 모호해진다.

“자각몽이란 ‘이건 꿈이야’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꾸는 꿈입니다. 꿈에 현실이 끼어들고 현실에 무의식이 끼어드는 상태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중첩될 때 삶의 본질이 선명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현실이 개입될 때 꿈은 더욱 구체적이 됩니다. 그것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싶어서 극사실로 묘사했습니다.”

낯익은 대상을 전혀 맥락이 다른 장소에 배치해 심리적 충격을 주는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을 연상시키지만 그는 “초현실주의를 의식하면서 그리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어떤 개념이나 의도를 미리 정해놓고 작업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정한 테두리 안에 갇혀버릴까 걱정되어서입니다. 주로 직관에 의지해 해왔던 작품들을 역추적하다 보면 일련의 경향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담은 겨울 우화

〈심호흡 a Deep Breath〉, oil on canvas, 194x130cm, 2007
〈막간(intermission)〉 연작에서는 공연무대에나 있음직한 장막이 등장한다. 현실이 아니라 가상공간임을 암시하는 장치다. 아직 공연이 끝나지 않았음을, 꿈인 줄은 알지만 아직 깨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2007년 작품 〈심호흡〉에는 초원에 어린이용 점퍼가 놓여 있다.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이지만 점퍼의 크기가 건물처럼 거대하다. ‘거인의 아이가 벗어놓은 점퍼일까?’ 이런 불일치에서 상상이 시작되고 해석의 여지가 넓어진다. 2남 1녀 세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옷, 장난감 자동차 등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대상을 자신의 그림에 등장시켰다. 2008년 작품 〈거대한 잠〉에서는 하늘색 조끼를 입은 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다. 오동통 귀여운 손을 만지고 싶을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하지만 풍경에 비해 아기는 거인처럼 거대하고, 뒤에 보이는 장난감 자동차는 실제 자동차와 비슷한 크기다. 뒤죽박죽인 비례로 맥락이 바뀌면서 친숙한 소재들이 낯설고 기이한 장면이 된다.

“아이 셋의 어릴 적 모습을 모두 그림으로 담았습니다. 딸이 숨바꼭질 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도 있었는데, 작업실에 있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더니 전시 후 팔리고 나니까 ‘왜 나를 파느냐?’고 섭섭해하면서 울었습니다.”

〈막간 Intermission〉, oil on canvas, 91x73cm, 2012
작가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작품은 우리 모두의 유년기적 기억을 일깨우고, 고대 조각이나 유니콘을 연상시키는 말 조각은 우리 내면의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일상과 꿈,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 현실과 기억, 현실과 신화 사이의 풍경인 셈이다. 2010년부터 그는 눈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명했던 풍경은 눈발에 가려 흐릿해졌다. 그리스 조각이 눈 속에 파묻히고, 눈 덮인 나무들 사이로 빨간 자동차나 기차가 지나가고, 양 두 마리가 마주보고 서 있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담은 겨울 우화처럼 보인다.

“겹겹이 공간을 채우면서 시야를 뿌옇게 흐리는 눈의 입자들이 시간의 알갱이처럼 보였습니다. 시간이 쌓이면서 흐려지고 잊히는 기억들…. 그런 망각의 풍경, 망각에서 건져낸 기억들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 일을 바로 어제같이, 혹은 어제를 아득한 옛날같이 기억하기도 하잖아요?”

그는 2003년 첫 개인전 이후 거의 해마다 개인전을 열고, 국내뿐 아니라 미국, 영국, 일본, 홍콩, 중국, 아랍에미리트 등지의 전시나 아트페어에 참가해 왔다. 대학원 졸업 후 전업 작가가 되었고, 꾸준하고 부지런하게 작업해 왔다. 지금은 2017년 6월 갤러리조선에서 열리는 개인전 준비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눈 풍경이 되겠죠. 언젠가는 이 작업에서 빠져나오겠지만, 지금은 더 해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요. 중요한 전시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목이나 방향을 미리 정해 놓고 작업하지는 않습니다. 작업해 놓고 보면 제 작품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느낄 수 있겠지요.”
  • 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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