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주메뉴

  • cover styory
  • focus
  • lifestyle
  • culture
  • human
  • community
    • 손글씨
    • 1등기업인물
    • 나도한마디
    • 기사제보
  • subscription

“달의 뒤편”으로 헤엄쳐 가는 우리들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임봄 〈백색어사전〉

겨울나무가
수많은 잎을 잉태하는 소리,

얼음 밑에서
물고기가 우는 소리,

괜찮다 괜찮다 내리는 눈발이
각진 말들을 품어 안는 소리,

취해 잠든 당신의 눈꺼풀 뒤편
눈동자 속을 흐르는 물소리,

사전에 활자로 정의된
나, 너, 우리, 나, 너, 우리

마른 땅에서 서로를 핥던 물고기가
달의 뒤편으로 헤엄쳐 갈 때를 기다려
당신이 꽁꽁 언 내 마음을 지나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소리,

임봄 시집 《백색어사전》, 장롱, 2015


누군가는 백색에서 흰옷을 숭상한 백의민족의 심정적 편애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지고(至高)의 미를 연상할 테다. 백색은 음양오행의 상징체계 안에서 서방의 정색으로 쇠에 속하고, 세속의 오탁에 먼 신성한 것의 표상이다. 우리 신화에서 신들이 모두 흰옷을 걸치고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백색은 부재의 자리, 공백이나 여백을 드러낸다. 더 구체적으로 백색은 색의 위계에서 표준이 되는 영점(零點)이고, 색의 부정으로 견고한 정체성을 이루는 색의 궁극이다. 백색은 모든 색을 버리고 비워서 얻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색채는 빛의 산란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다. 빛이 사라진 밤의 어둠에서 사물과 세계는 색채를 벗은 뒤 귀기 어린 외관을 하고 익명으로 돌아간다. 밤의 어둠이 색채와 형태들을 다 지워버리는 것이다. 해가 뜨고 누리에 빛이 퍼질 때만 밤이 지워버린 사물의 색채와 윤곽이 돌아온다. 낮-세계의 ‘있음’은 빛 속에서 오연하다. 그리하여 낮-세계가 색채의 향연임을 드러낸다.

시집의 표제로도 쓰인 〈백색어사전〉은 특이하게도 색을 소리의 영역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이 시에서 백색의 세계를 빚는 것은 얼음, 눈발, 달, 안개 따위들이지만 그것은 시에서 그다지 중심적 사유를 이끌지는 않는다. 오히려 ‘색’보다 ‘소리’들이 또렷하게 부각되는데, 겨울나무가 잎을 잉태하는 소리, 물고기가 우는 소리, 눈발이 각진 말들을 품어 안는 소리, 눈동자 속을 흐르는 물소리, 당신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소리들이 제시된다. 백색의 흔적들은 증발하고 그 자리에 잉태하고, 울고, 품어 안고, 흐르는 소리만이 돌올하게 솟아난다. 무엇보다도 소리는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의 기척이다. 죽어서 부동하는 것은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한다.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이 겨울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겨울은 모든 산 것들에게 최소한도의 생존을 허락하는 시련의 계절이다. 그 시련 속에서 산 것들은 소리로써 겨우 살아 있다는 기척을 내고 있는 것이다.

마른 땅에서 서로를 핥던 물고기가
달의 뒤편으로 헤엄쳐 갈 때를 기다려
당신이 꽁꽁 언 내 마음을 지나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소리,

마지막 연은 실존의 곤핍함에 대해 얘기한다. “마른 땅에서 서로를 핥던 물고기”란 구절은 우리가 삭막한 세계에 내던져 있음을 암시한다. 마른 땅에서 겨우 서로의 입김을 불어주고 혀로 핥으며 공생을 도모하는 물고기들이 가려는 “달의 뒤편”은 얼마나 먼 곳인가? ‘달의 뒤편’은 우리가 실존에 허덕일 때 꿈꾼 적이 있는 미지의 장소고, 미래의 시간이다. ‘달의 뒤편’은 흰색의 평화, 흰색의 기쁨으로 충만한 흰색의 피안(彼岸), 흰색의 무릉도원일 테다. 물론 많은 이들이 그 피안의 세계에 닿기 전에 좌초하고 낙오하고 말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꽁꽁 언 내 마음을 거쳐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고 한다.

내 마음은 왜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이고, ‘당신’은 왜 그 언 마음을 거쳐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고 하는가? 시인은 그 사정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은 이 세상에서의 많은 인연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엇갈리고 있음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이 시집은 한강의 소설 《흰》(2016)과 겹쳐 읽을 만하다. 한강은 ‘흰’ 것들의 이미지를 탐색하고, 그 사유의 내역을 서사 형식을 빌려 드러낸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따위가 그것들이다. 흰색은 빛에 가깝다. 그러나 ‘흰’ 것들만 희게 보이는 건 아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 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았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그 ‘흰’에 바친 헌사. 한강의 소설은 그 헌사들로 꾸며진 기묘하고 아름다운 서사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생의 안쪽에 수많은 ‘흰’ 것들의 아련한 이미지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흰’은 감정이고 시간이며, 감정과 시간이 퇴색한 흔적들, 탄생과 죽음에 걸쳐 있는 생의 유적을 암시하는 그 무엇이다. 일본의 하라 겐야는 《白》이라는 책에서 “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얗다고 느끼는 감수성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강의 《흰》이나 임봄의 백색 시편들은 단지 백색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그 백색에 반응하는 감수성의 떨림들을 따라간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삶은 ‘백색 유희’ 그 자체다.

임봄은 백로, 흰 뼈, 하얀 젖무덤, 첫눈, 하얀 양파 꽃, 흰 머리카락, 은빛 달, 소금호수, 흰 종이, 흰 손, 하얀 박 속, 흰 천, 하얀 가면, 흰 고무신, 하얀 찔레, 하얀 문풍지, 백지, 흰 달빛, 백야… 따위의 실로 다양한 이미지들을 불러들여 ‘백색 향연’을 펼치고, ‘백색어사전’을 꾸린다. 이 세계에 이토록 ‘흰’ 것들이 지천이었다니! 결국 백색은 모든 색들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이다. 검은 머리는 하얗게 변하고, 흰머리는 노화의 징표다. 오래 묵은 것들은 다 흰색에 가까워진다. 흰색은 소멸의 징후다. 노인의 흰머리는 젊음의 약동하는 기운이 다 쇠해지고 죽음이 지척에 와 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시인은 백색이 꿈, 환(幻), 망각, 소멸의 뜻을 품고 있고, 궁극으로 공(空)이며 무(無)의 표상이라는 것에 기대어 우리 실존의 가없음을 노래한다. 임봄의 백색 시편들은 우리 생의 가없음을 노래하는 백색의 비가(悲歌)다.


임봄(1970~ )은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2009년 계간지 《애지》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특이하게도 ‘백색’ 이미지들을 탐구하는 시들을 썼다. 임봄은 드러내놓고 백색을 편애하고 그것을 탐구한다. “백색은 검정색을 딛고” 오고, “이상과 허상의 경계를 통과한 빛”이며, “숫자 뒤에 붙어 무한대가 되는” 그 무엇이다. 시인은 제 무의식에 쌓인 백색을 파헤치고 불러내고 추궁하면서 노래하는데, 그런 시인을 백색의 무녀(巫女/舞女)라고 부를 만하지 않는가? 시인의 무의식에 결백과 순수에의 희구가 들끓고 있는 것일까. 시인은 무아지경으로 백색에 빙의된 혼으로 춤을 춘다. 그 춤의 절정에서 백색으로 물든 성모천왕(聖母天王)의 신화를 채색한다. 시인은 백색의 몽상 속에서 사랑과 이별을 겹쳐보고, 생과 죽음의 이미지들을 길어낸다. 임봄은 2015년 이 ‘백색 시편’들을 모아 첫 시집 《백색어사전》을 펴냈다. 시인은 평택의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고려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중이다.
  • 2016년 11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 article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김소형 〈두 조각〉

[2017년 03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안미린 〈반투명〉

[2017년 02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이병일 〈진흙 여관〉

[2017년 01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려원 〈사과 한쪽의 구름〉

[2016년 12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유계영 〈에그〉

[2016년 10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오은 〈그 무렵 소리들〉

[2016년 09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유진목 〈신체의 방〉

[2016년 08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이기성 〈포옹〉

[2016년 07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이이체 〈몸의 애인〉

[2016년 06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안주철 〈밥 먹는 풍경〉

[2016년 05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김민정 〈김정미도 아닌데 ‘시방’ 이건 너무하잖아요*〉

[2016년 04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안희연 〈몽유 산책〉

[2016년 03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하린 〈늑대보호구역〉

[2016년 02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이원 〈목소리들〉

[2016년 01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송재학 〈햇빛은 어딘가 통과하는 게 아름답다〉

[2015년 12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공광규〈수종사 뒤꼍에서〉

[2015년 11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박연준 〈우산〉

[2015년 10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이상국 〈혜화역 4번 출구〉

[2015년 09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손세실리아 〈낌새〉

[2015년 08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송승언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2015년 07월호]

시 읽기의 즐거움 전파하는 장석주 시인

[2015년 06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고영 〈달걀〉

[2015년 05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민구 〈움직이는달〉

[2015년 04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양애경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2015년 03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2015년 02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성동혁 〈여름 정원〉

[2015년 01월호]

하단메뉴

상호 : (주)조선뉴스프레스 | 대표이사 : 김창기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 통신판매 신고번호 : 제2015-서울마포-0073호
서울 마포구 상암산로 34 DMC 디지털큐브빌딩 13층 Tel : 02)724-6834, Fax : 02)724-6829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임현선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