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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말놀이를 사랑해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오은 〈그 무렵 소리들〉

정수리가 토마토 꼭지처럼 힘없이 떨어져나갈 무렵,

팬파이프 소리, 피아노의 스물네 번째 건반 소리, 병든 아이의 숨소리, 마지막이 가까스로 유예되는 소리, 돌들이 튀어오르는 소리, 해바라기씨가 옹기종기 모여 한꺼번에 마르는 소리, 당신의 입술이 벌어질 때 나는 최초의 소리, 모래알들이 법석이는 소리, 조개들이 통째로 기어가는 소리, 눈물이 볼을 타고 견디듯 흘러내리는 소리, 티슈 한 장이 먼지 부연 선반 위로 떨어지는 소리, 수억 광년 묵은 별똥별이 전쟁터에 불시착하는 소리, 틀어막은 여자의 입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겨우 새어나오는 비명 소리,

말들이 징검다리고 밥이고 우주고 엄마고 바로 당신이었던 그 무렵, 낙오된 귀를 열어젖히는 한없이 낯선 소리, 에르호 에르호……

오은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2013


오은은 말들을 갖고 논다. 이 재능 있는 젊은 시인은 ‘말놀이’를 통해 제 시의 입지를 세운다. 오은의 말놀이는 물놀이, 맛놀이, 몸놀이, 멋놀이 무(無)놀이, 문놀이, 몽(夢)놀이, 말[馬]놀이, 맥놀이, 멱놀이, 몇놀이, 맘놀이, 못놀이다. 오은의 〈ㅁ놀이〉는 재잘재잘, 벌컥벌컥, 첨벙첨벙, 우적우적, 폴짝폴짝, 찰랑찰랑, 찰칵칼칵, 딸깍딸깍, 두근두근, 어푸어푸, 무럭무럭, 거푸거푸 따위 다채로운 의성어와 의태어들이 존재 바깥으로 발화되면서 말놀이의 가벼움과 발랄함은 폭발한다. 이 놀이는 언어의 규범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넘나들며 음소(音素)들이 부딪치고 어우러지며 말의 한마당을 펼쳐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의미 맥락이 아니라 유희가 만드는 즉흥성, 흥겨움, 재미 따위다. 대개 놀이는 천진무구한 아이들의 전유물인데, 특히 아이들은 말을 갖고 놀 때 즐거워한다. 오은은 아이들이 말 속에 스민 정신을 밀어내고 소리에 집중하듯이 말놀이에 열중한다.

팬파이프, 피아노, 병든 아이, 돌들, 해바라기씨, 모래알, 조개들, 별똥별… 들은 저마다 제 소리를 낸다. “당신의 입술이 벌어질 때 나는 최초의 소리”에서 “틀어막은 여자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비명까지 소리의 영역은 넓고 크다. 소리는 그 자체로는 질료다. 이 소리들은 공기들을 흔들며 흩어져나간다. 소리는 공중에 흩어져 사라지는데, 소리를 붙들고 있는 것은 정신이다. 사람이 내는 소리 안에는 항상 정신이 작동한다. 소리는 정신에 지배되고, 소리는 말의 내부로 완벽하게 스미며 말-소리는 융합해서 한 몸통을 이룬다. 말은 곧 그것을 발화하는 이의 정신이다. 소리는 정신으로 곧바로 전환한다. 소리는 보통은 말의 내부에 깃든 정신에 의해 제압된다. 이때 소리와 정신은 하나다. “소리와 정신의 합일은 창조의 시원에서부터 솟아나와, 서로 분리된 사물들의 세계로 진출한다.”(막스 피카르트) 사람은 말-소리를 내는 순간부터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다. 사람은 말-소리를 통해 혼자를 넘어서서 너른 타자의 지평에 연결되는 것이다.

자, 보라. 팬파이프는 울리고 피아노의 건반들은 선율을 쏟아낸다. 돌들은 튀고, 해바라기씨는 마르며, 모래알들은 법석이고, 조개들은 기어간다. 눈물은 볼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리고, 수억 광년 떨어진 자리에서 빛나던 별똥별들이 땅으로 떨어진다. 이 모든 사물들은 움직이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내부 질량의 변화를 꾀하면서 다양한 소리들을 내는 것이다. 오은에 따르면, 이 세계는 사물들이 내는 소리들로 꽉 차 있다. 시인은 소리의 강박적 채집자처럼 이 소리들을 모으고 펼쳐놓는다. 소리들은 공기를 흔들어 파장을 만든다. 이 파장은 멀리 퍼져나간다. 이 소리들은 모든 사물이 겪는 변화들을, 인생 유전(流轉)과 운명의 징표들을 나타낸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목소리를 가진 존재다. 목소리는 자기가 거기에 있음을 타자에게 알리는 음성-신호다. 목소리가 곧 말이다.

나, 여기 있어! 우리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호명하고, 명령하고, 부탁하고, 애소한다. 우리가 목소리로 타인과 소통할 때 이것은 나와 너 사이를 잇는 다리다.

사람은 소리의 세계에서 말의 세계로 나아간다. 존재함에서 의미지평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반면 동물들은 말이 채 되지 못한 소리의 세계에 머문다. 동물들의 소리는 말로 깨어나지 않는, 정신이 스미지 않은 질료 상태에 머문다. “동물의 소리는 불확실하다. 지표면과 바로 접촉하면서 퍼져나가는 어두운 안개처럼, 동물은 표면에 달라붙은 채 수평으로 스스로를 확장한다.”(막스 피카르트) 동물들의 소리가 지표면과 가까운 수평으로만 퍼져나가는 것은 이 소리가 심연인 말로 전환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말로 나가지 못하는 소리의 세계에 고립된다. 말이 되지 못한 이 소리는 침묵에 더 가깝다. 동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침묵의 단단한 외피에 갇힌다. 동물은 그 침묵의 외피를 벗어버리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동물과는 달리 사람이 내는 말은 소리이면서 동시에 정신이다. 사람의 소리는 정신의 명료성을 안고 말로 태어난다. 그리하여 사람의 말은 ‘징검다리’ ‘밥’ ‘우주’ ‘엄마’ 그리고 당신이다. 그러니까 말들은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는 말의 세계다. 시의 화자는 “낙오된 귀를 열어젖”힌 채 “한없이 낯선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귀에 울려오는 소리가 “에르호 에르호…”다. ‘에르호’는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영원과 하루〉에 나오는 노시인 알렉산더가 생의 끄트머리에 발견한 시어 중 하나로 ‘나’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한다. 말을 쓰며 산다는 점에서 우리는 저마다 말하는 ‘나’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사람이 자신에 앞서서 주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사람이 선험적 존재라는 뜻이다. 삶에 대한 의식이나 제 죽음을 미리 끌어당겨 봄이 그 선험성의 증거들이다. 사람은 저보다 앞서 있음으로 태어나 살다가 죽는 존재다. 이게 가능한 것은 사람이 말을 쓰기 때문이다. 말은 사람보다 앞선다. 사람이 말을 익히기 전에 말은 이미 세상에 있다. 사람 안에 말은 이미 깃들어 있다. 입 밖으로 발화된 소리에 의미라는 옷이 입혀지면서 말이 탄생한다. 사람은 말을 하는 존재로 거듭나면서 무의미의 나락에서 위로 떠오른다. 이 상승은 말이 빛이라는 증거다. 빛은 가벼워서 항상 위로 떠오른다. “말은 소리로부터 나와서 빛이 된다. 소리는 말 속에 빛으로 깃든다. 음성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이 말 속에서 서로 중첩된다.”(막스 피카르트) 말의 전체성 안에서 사람은 새롭게 그 존재 의미를 빚어낸다. 아울러 시는 바로 이 말의 건축술이다. 시인은 말들을 쥐락펴락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말들을 쥐락펴락하며 짓는 이것은 “풍부한 건물”이고, 더러는 “거대한 잿더미” 그리고 “위태로운 집”이다.(〈건축〉) 결국 사람은 말로 지은 집에서 살다가 말문을 닫고 저 영원한 침묵의 세계로 떠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오은(1982~ )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어린 오은은 날마다 국어사전을 들춰 보며 마음에 드는 단어를 찾아 읽곤 했다. 국어사전에서 찾은 단어들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초등학교 통지표에 “글이 두서없으나 어휘력이 풍부하다”라고 적혔단다. 국어사전에 빠진 초등학생이라니! 소년 오은은 어휘력이 풍부했다. 그 재능을 기반으로 백일장에 나가 산문도 지어내며 시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2002년 봄 월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그는 산문시 비슷한 것을 끼적였는데, 형이 그걸 시 잡지에 투고한 것이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시 잡지에서 “등단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는 ‘등단’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등이 있다.
  • 2016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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